새벽 빗소리
새벽 빗소리
투둑, 투둑 소리가 나더니 곧 ‘쏴아’하며 쏟아지는 빗소리가 잠자리를 파고 듭니다. 밤사이 충청과 강원에 많은 비가 내린다더니 이제부터 시작하나 봅니다. 벌써 한 달 넘게 비가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에 큰 물난리가 났다는 방송을 보았습니다. 댐의 수위가 높아져 물을 방류하니 하류에 물난리가 납니다. 불어난 물에 차가 떠내려가고 지붕만 남은 집들이 화면에 잡힙니다. 부산에도 물난리가 나서 걱정이 많답니다.
엊그제는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무지개가 떴으니 보러 가자는 아내의 말에 따라 나서면서도 시큰둥했었는데 옥상에 올라보니 큼직한 무지개가 가늘게 하늘에 둥실 떠 있었습니다. 구름 낀 뿌연 하늘을 배경으로 반원에 가까운 활꼴을 그리는, 그런대로 눈에 띄는 색깔들이 날 위로해 주고 있었습니다. 텅 빈 배경에 조금은 어설퍼 보이는 크고 가는 일곱 색깔 궁륭은 하늘에 걸린 선물이었습니다. 옥상 어디에 서 보아도 날 중심으로 무지개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배경이 텅 빈 듯 아름다운 걸 보았습니다. 가득 차서 텅 빈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온통 회색빛 구름으로 덮인 하늘은 텅 빈 도화지 같았습니다. 무지개만 있어 그 약속만 생각했습니다. 다시는 큰물로 땅을 멸하지 않을 것이며 사계절이 쉼 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며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어스름 저녁이어서 무지개가 흐릿하고, 얼마못가 사라졌지만 무언가 값진 위로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
오랜만에 반가운 이를 만나면 별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따듯하고 흐뭇하듯이 꼭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알 수는 없어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습니다. 좁고 미끄러운 옥상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시절은 어렵고 들려오는 소식들은 우울합니다. 고난의 경자년입니다. 지구촌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어려움을 겪으며 매일매일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새로이 환자가 되었나를 확인합니다. 이 시절에 많은 이들에게 기쁨이 되는 소식이 무엇이 있을까요? 지루한 이 질병을 막아낼 약품이 개발되었다는 것 일 겁니다.
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그 병균이 사람을 매개로 옮긴다니 너무 빈번한 이동이 원인입니다. 그렇게 많은 곳을 자주 찾아다니는 건 더 많은 이윤을 남기고, 남보다 더 많은 것들을 보고, 소유하기 원함입니다. 가지 않아도 될 곳들을 많이도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우리 사회가 권유도 했습니다. 외국에 나가는 것을 은근히 자랑처럼 여겼습니다. 조금만 가지고도 풍요를 누리는 길을 익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 양극화가 심각한 문제입니다. 조금 가지고 있는 이들이 오히려 마음을 비우려하고 많이 가진 이들은 더욱 소유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일에 바빠서 하늘을 볼 새도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들이 맑은 날 밤하늘 별들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은하에 약 1000억 개의 별이 있고 우주에 1000억 개 가량의 은하가 있다고 합니다.
경제적인 것에서 조금만 자유로울 수 있다면 삶은 더 다채롭고 여유로울 것 입니다. 돈은 우리를 편리하게 해주기는 하지만 섬겨야 할 존재가 아니라 사용해야 하는 도구라 생각합니다. 요즘은 수시로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을 합니다. 불과 삼사십년 전인데도 너무 어려운 시절을 사셨습니다. 쉬지 못하고 일을 해도 안락한 삶과는 무척이나 멀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땔 것을 걱정하셨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명품인가 아닌가, 또는 품질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인 것들의 절대적인 결핍은 해결된 게 우리 사회입니다.
질병으로 지루함이 일상이 되었지만 주변 환경은 더 좋아졌다는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욕심을 줄이면 삶이 더 단순해지고 행복해질 것만 같습니다. 몇 나라에서 백신을 위한 최종단계 실험을 하고 있답니다. 얼마 가지 않아 이 질병의 위력은 크게 줄어들 겁니다. 그때에도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는 곳과 타는 것, 먹고 입는 것이 더 이상 신분의 상징이 아닌 필요와 기능에 따른 것들이 되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빗소리가 잦아들고 있습니다. 세상이 부윰하게 밝아 옵니다. 비 내린 길거리는 한결 깨끗해질 겁니다. 무심천을 흘러내리던 노한 물결이 떠오릅니다. 한 때의 급한 물살이 지나가고 나면 물은 더 맑아지고 흐름은 잔잔해집니다. 그 위로 햇살이 비치고 오리들 사이좋게 노는 풍경이 이어질 겁니다. 폭우는 하루를 넘지 않을 겁니다.
엊그제 해거름에 하늘에 걸렸던 무지개를 생각합니다. 좋은 일들이 이어지고 이 땅이 평안해질 겁니다. 이 질병을 이길 백신이 곧 나올 것이고 마침내 질병은 물러갈 겁니다. 수해를 당한 이들이 다시 희망을 품고, 물에 젖은 가재도구들을 햇볕에 내다 말리며 내일을 꿈꿀 겁니다. 이 여름이 가고 푸르고 높은 하늘로, 서늘한 가을이 우리 곁으로 다가올 겁니다. 그러한 삶의 모습이 무지개가 베푸는 약속입니다. 빗소리가 멎었습니다. 오늘은 기상청의 일기예보가 빗나가면 좋겠습니다. 문 열고 나가면 환한 얼굴로 분홍빛 백일홍이 맞아줄 겁니다. 오늘이 어제보다 나은 날이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