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와 편견
무지와 편견
일본어와 함께 익숙한 음이 흐른다. 가사는 몰라도 귀에 익은 음이 한국가수가 부른 노래다. 궁금함을 풀고 보니 〈백만 송이 장미〉란다. 그렇다면 우리 가수가 일본 원곡을 번안한 것이려니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원곡은 러시아민요고 다른 가사로 바뀌어 여러 나라에서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단다.
세 나라 가수가 제 나라의 언어로 부른 노래를 들어 보았다. 가수 심수봉이 부른 우리 것이 가장 좋았다. 망설임 없이 무지와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언어와 문화를 모르고 제대로 노래를 감상할 수 있을까. 그러니 우리말이 가장 낫게 다가왔겠지. 심수봉이라는 익히 알려진 가수도 편견에 한 몫을 했음직하다. 누가 편견이 없다 할 수 있을까. 차라리 편견 덩어리라고 하는 게 사실에 가까울 게다. 러시아 민요에 덧붙여졌다는 새로운 가사가 실화라고 강조되어 있다. 확인할 길이 없으니 일단 믿기로 하자. 내용은 이렇다.
유명 여가수가 순회공연 중에 가난한 화가가 활동하고 있는 지역에 들렀다. 빈한한 화가는 여가수를 흠모하여 자신의 모든 것, 집과 작품과 피까지 팔아 가능한 장미를 많이 사들였다. 여가수가 머무는 호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광장을 백만 송이 장미로 가득 채운다. 여가수는 아침에 일어나 자신을 위해 베풀어진 놀라운 광경을 본다. 어느 부유한 이의 정성이려니 추측하며 기차를 타고 다음 공연 도시로 떠난다. 화가는 불행한 삶을 살지만 광장을 가득 메운 백만 송이 장미를 평생 간직하고 산다.
심수봉이 부르는 이 노래에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 나라로 갈 수 있다네”라는 가사가 후렴구처럼 여러 번 되풀이 된다.
그립고 아름다운 착각과 환상 속에 자신의 별나라에 자주 갔으리라. 많은 이들에게 그 화가의 행동이 어떻게 비쳤을까. 제 정신이 아닌 행동으로 받아들여졌을 게다. ‘그게 뭐하는 짓이여, 미치지 않고야 어떤 놈이 그 짓을 해’ 오랜 세월이 흘렀을 이 시점에 나도 갖게 되는 생각이다. 누가 편견이고 누가 제 정신일까. 절실하게 다가와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행동을 어떻게 한두 마디로 잘라 말 할 수 있나. 노래로 알려져 세계인의 가슴에 남고 그 일화가 긴 세월 전해진다면 그 만한 가치가 없다 할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하루아침을 위해 소모된 백만 송이 장미를 생각해 보자고 할지 모른다. 장미가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은 씨앗을 맺어 후세에 남기기 위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때다. 수많은 장미들에게 본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 처사가 지나치지 않느냐 할 것이다. 장미에게는 한 여인을 향한 사랑의 숭고함보다, 미래로 가는 생명의 길을 막았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 아닐까. 여기에도 인간의 가득한 무지와 편견이 들어있다.
아름다운 자태로 활짝 피어나는 순간이 사랑을 향해 자신의 전 존재를 열어놓은 가장 도발적인 쾌락의 순간이다. 하지만 장미에게 그런 의식이 아예 없을 수 있다. 장미에게 다른 풀과 나무의 꽃가루는 영향도, 유익도 없다. 오직 장미의 화분에만 열려있는 기회지만, 가루받이로 인한 흥분도 쾌락도 장미에겐 없다. 벌과 나비들은 날아와 그들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꽃가루와 꿀을 가져 가고, 장미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꽃잎을 열고 향기를 내뿜을 뿐, 개체적 호오(好惡)가 끼어들 여지는 없을 게다.
편견이 다양성의 뿌리요 세상의 평형을 유지하는 힘이며 어느 하나에 끝까지 매이지 않게 하는 균형추다. 모든 것을 온전하게 알 수 없기에 이 땅의 삶에 호기심을 품고 내일을 향해 나아간다. 누군가 사랑은 비극이라 했다. 상대에 대한 착각과 환상[무지와 편견]에서 사랑이 시작되고 그것들이 깨지고 그 자리에 현실이 들어서며 고통과 아픔이 시작된다.
신데렐라 이야기에도 무지와 편견으로 이루어진다. 현실적으로 유리구두가 신데렐라에게만 맞을 리 없다. 신데렐라와 유사한 키와 몸무게를 가진 많은 이들에겐 유리구두가 230이든, 240이든 잘 맞았을 것이다. 또한 동화가 보여주듯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도 아니었을 게다. 신 여사가 왕자와 결혼한 후에도 뭇 여성에게로 향하는 왕자의 성품은 여전했을 테고, 신 여사에 다한 왕자의 착각과 환상도 오래지 않아 현실로 치환되었을 게다. 여러 위기를 관리하는 걸 학습하지 못한 신 여사가 왕실의 삶을 견디기는 너무 어려웠을 테니 행복보다 불행한 삶이 이어졌을 개연성이 훨씬 더 높았으리라.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눈을 멀게 하는 편견이 그나마 이 땅을 한없이 삭막하지만은 않은 훈훈한 세상으로 바꾼 것은 아닌가. 첫눈에 반하고 환상 속에 사는 시기라도 있었으니 오늘의 가정이 이루어졌고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요즘도 가끔은 군대에 다시 가는 흉몽을 꾼다. 남자들에게 군대를 한 번 더 가라하면 얼마나 힘들까. 몰랐으니 다행이었지, 다 알았다면 너무나 고통스러웠을 게다. 무지와 편견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고 가보지 않은 길도 기대와 설렘을 품고 다가설 수 있다.
〈백만 송이 장미〉가 가수 심수봉만의 노래가 아니라 해도, 자신의 모든 것을 들여 광장을 장미로 장식한 화가가 제 정신이 아니어도 그 노래에 내 감성 한 부분이 살아나고, 어처구니없는 화가의 행동에 잠들었던 삶의 열정이 깨어난다면 그들로 내 삶이 풍성해진 게다. 무지와 편견에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자주 있다. 고맙고 또 고마워하자, 무지와 편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