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함께

초한지를 읽으며

변두리1 2020. 6. 21. 21:07

초한지를 읽으며

 

번역자에 따라 다양한 권수가 되는 게 외국의 장편소설이다. 원본을 충실히 번역한 것을 읽었다고 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이는 열권으로 편역한 초한지를 장개충은 오백사십 여쪽으로 편저해 놓았다. 이름만 보고 중국인으로 알았는데 순수한 한국인이었다. 읽고는 분명하게 들어오지 않아 일본인이 그린 스물한 권짜리 만화책을 보았다. 만화작업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을 알았다. 그래도 며칠 못가 줄거리가 희미해진다.

힘이 장사였던 항우,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라 하고 싸우면 이기는 그였다. 우미인과 오추가 생각나고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떠오른다. 그가 당연히 최후의 승자가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미관말직에 싸우면 늘 지기만 하는 유방이 승자로 남는다. 일의 결과를 두고 사람들은 분석을 한다. 심하게 말하면 결과에 논리를 맞추는 게다. 그 안에서 몇 가지 이야기를 해보자.

사람이나 사물이나 그 능력과 가치를 온전히 발휘하고 사는가 하는 문제다. 오추가 항우를 만나기 전에는 골칫거리 사나운 말이었을 뿐이다. 항우가 길들여 사용하니 천하의 명마가 되었다. 어찌 말뿐일까. 한신이 초나라에 있을 때는 많은 관리 중에 하나였으나 한나라에 오자 총사령관 대장군이 된다.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마당이 펼쳐져야 숨은 것들을 드러낼 수 있다. 모수자천(毛遂自薦)이라지만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대의명분(大義名分)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오늘의 표현으로 여론(輿論)이다. 긴 세월 무명으로 어려움을 겪든 이도 한순간 유명해지고 대중이 자신을 인정해주면 신바람이 나고 없던 힘도 솟구치고 돕는 이들도 나타난다. 거꾸로 천인소지(千人所指)면 무병이사(無病而死)라고 만인에게 비난과 원망을 받고 잘되기를 바랄 수 없다.

항우는 포악무도함으로 민심을 잃고 유방은 민중을 위함으로 지지를 얻는다.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숨는다고 했다. 명분을 잃으면 다수가 떠나가고 적들이 많아진다. 함안에 먼저 입성하는 이가 왕이 될 것이라 했는데 항우는 힘껏 싸웠어도 유방보다 늦었다. 유방에게 많은 고을이 싸움 없이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손자도 가장 바람직한 것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곧 부전승(不戰勝)이라 했다. 혼자하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함이 더 효과적일 것은 어린 아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책 전편을 통해서 보여주는 사실은 진실한 조언을 듣지 않으면 잘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지도자가 충신들의 조언을 잘 들어준다. 어쩌다 그들이 자기의 의견을 관철하려 하고 주변의 진실한 조언을 물리치면 어려움을 크게 당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최종 결정은 늘 지도자의 몫이고 우리 삶에서는 자신의 책임이다. 귀가 얇아서 자기 주견 없이 남의 말에 혹하는 것도 문제지만 자신의 틀 안에 갇혀 우물 안 개구리처럼 행동하지 않는지 경계할 일이다.

지도자와 참모들의 관계를 생각하면 참모들은 너무 생각이 많아 부정적이거나 기회를 놓칠 때가 있고 지도자는 참모들의 의견을 지나친 염려로 일축하기도 한다. 참모들의 운명은 지도자에게 달려있다. 아무리 빼어난 책략을 가지고 있어도 지도자가 수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범증은 자신의 주인으로 항우를 택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책 여기저기에서 도사라 할 이들이 활약한다. 어떻게 관상으로 한 인간의 운명을 그렇게 알 수 있다는 것인지 의문이다. 소설을 쓰는 이 편에서는 그것만큼 편리한 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면 사람의 일생은 운명에 의해 정해져 있고 그것이 얼굴로 나타나니 무슨 노력과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말 그대로 생간대로, 타고난 대로 살다 갈 수밖에 없다. 논리와 상식을 뛰어넘는 비약이 그곳에 있고 치밀함을 결여하는 요소일 수 있다.

한 사람의 소중함이 그립다. 장수들과 최고 지도자만 인격이 있고 가정이 있는가. 현대적으로 바꾸면 인권이다. 가볍게 수만을 죽이고 또 죽는다. 그것이 전쟁의 비극성이지만 지나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야기 속에서 만나는 병사들은 하나같이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유교적인 가치관이랄까. 가족의 소중함, 그 중에도 부모를 아끼는 마음이 의도적으로 강조된 듯하다. 유방이 인질로 잡힌 부모님을 구출하기 위해 일시 휴전을 하는 것이나 왕름을 데려오기 위해 어머니를 매개로 하는 것은 효에 대한 의식이 확고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의 내리사랑에 비추면 인간의 본성을 극복하는 사회적 교육의 위력을 느낀다.

실력이 있다고 그에 알맞은 자리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시기하는 이들도 나타나고 자신의 위치가 위협받는다고 여기면 중상과 모략을 당하기도 한다. 공자의 실력을 가지고도 14년 주유천하를 해도 변변한 자리를 얻지 못하지 않는가. 또한 실력이 너무 출중해도 여럿의 질시와 급기야는 최고지도자의 불안을 초래한다. 교토사주구팽(狡兎死走狗烹)이요, 비조진양궁장(飛鳥盡良弓藏)이라 하지 않던가. 처세하기 힘든 게 세상살이라 하겠다.

내 사는 세월에 큰 전쟁이 이 땅에 일어나지 않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다른 어떤 것보다 고마운 일이다.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곳에 소리가 있고 약함이 보일 때 위태롭다. 평안할 때, 힘을 튼튼히 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 전쟁의 위험성이 상존하는 지역에 사는 이들의 염려요, 더구나 강대국 사이에 끼여 있는 우리의 걱정이다. 정치 경제 외교 국방 모든 면에 실력을 기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