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형
작은형
늦은 밤에 작은형이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무런 느낌이나 감정의 동요가 없다. 스스로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 놀란다. 작은형이 스무 살 전반까지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생 시절까지 함께 살았는데, 삼남 일녀, 이 땅에 몇 안 되는 동기간인데 이렇게 밋밋할 수가 있나. 밤이 늦어 내일 형님 내외와 함께 올라가기로 했다.
최근 수년 동안 작은형과 그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다. 어쩌다 명절에 보곤 했는데, 근래에는 자녀들이 가정을 이뤄 처가에도 가야하니 내려오지 못하는 것으로 짐작했다. 한해가 넘었나, 작은형 가족들이 큰집에 들렀었다고 했다. 그때 많이 늙고 심신이 약해 보였단다. 그래도 언제나 가득한 허세가 있어 당당했던 모양이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입관을 진행하고 있었다. 작은형이 칠성판위에 누워있다. 한순간, 자녀들의 흐느낌이 일어나고 작은형의 지난날들이 스쳐지나간다. 어느 한 가지 일에 두세 해를 집중하지 못해 나이만큼 많은 직업을 가졌을 게다. 하드 장수, 엿장수를 비롯해 가장 번듯한 직업이었던 택시기사와 이발사에 이르기까지 온갖 일들을 해왔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전문가연 했다. 항상 자신있어했고 못할 일이 없었다. 시작할 때도 돈이 많이 들지만 그만 두려면 뒤처리가 더 어려웠을 게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평생을 당당하게 손 벌리며 살았을 인생이 가여웠다. 어려서는 부모께, 청년시절에는 형에게, 그 뒤로는 아내와 자녀에게 허풍떨며 요청을 할 때도 초라하고 힘겨운 마음에는 큰 차이가 없었을 게다. 긴 세월 도박을 향한 병적인 집착을 안고 살았다. 근년에 이르러도 하루걸러 경마장을 찾았단다. 몸을 돌보지 않고 그렇게 살았으니 본인이 힘든 건 말할 게 없고 주변 사람들에게 어려움도 많이 주었을 게다.
형수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않았을 것은 미루어 짐작이 간다. 내가 어려 잘 판단하지 못했었다. 형과는 네 살 터울이었으니 큰 차이가 없는 셈이었고, 여러 번 무리한 경제적 부탁을 하는 시동생이 형수 눈에 곱게 보였을 리 없다. 서로 제 살기 어려웠을 시절에 부탁하는 동생과 무리해서라도 들어주려는 형 사이에서 현실을 고려하면 싫은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을 형수, 형수 외에는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안으로 팔이 굽는 한 가족이었으니 그 관계가 얼마나 뒤틀렸을까. 서로 불신하며 경계의 세월을 살아 각자의 가족들에게 상대에 대한 불평과 비난의 말들을 쏟아냈다. 그 말들은 진실을 떠나 서로를 향한 담이 되고 심리적인 거리를 멀어지게 했으리라.
상갓집의 시간은 조금씩 천천히 흘러갔다. 묘지공원에 이르니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대기실에 가득하다. 지치고 덤덤한 표정들, 고인이 되어도 줄서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듯 알림판에는 진행 중과 완료가 쉼 없이 흐르고 있다. 시간이 멈춰 있는 곳, 주된 일이 기다리는 것인 곳에서 한 시간 반이 지루하게 흐르고 확성기는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작은형의 흔적들, 몇몇의 하얀 뼈들이 마치 쓰레받기에 쓸어 담기듯 일상적인 손길에 한곳으로 모이고 있다. 며칠 전만 해도 따듯한 피가 흐르고 흉하지 않게 살이 붙었을 육신이 오소소한 뼈들로 남고 잠시 후면 작은 항아리에 고운 유골로 담길 게다. 지상을 다녀갔다는 흔적들, 납골당에 안치된 항아리와 그리움을 보여주는 한 장 사진과 꽃들, 상처와 그리움을 품고 이 땅을 이어 살아갈 소수의 혈육과 친지들….
장례의 한 과정이 지났다. 내 삶의 터전으로 돌아오면서 ‘둥지를 떠난 가금류’처럼 살다간, 미운 오리 같았을, 작은형을 생각한다. 육신의 흔적은 작은 항아리에 갇혀 있지만 자유의 혼이 되어 가고픈 곳들을 기웃거리고 있을 게다. 소원했던 자녀들의 집을 돌아보려나, 미안한 마음으로 친인척들을 지켜보려나, 곰곰 생각하다 불현 듯 형과 내가 열 살 터울임이 떠올라 어쩌면 내게도 앞으로 십년쯤이 더 남아있는 게 아닐까하는 짐작이 나를 돌아보게 한다.
십년이지만 작은형과는 다른 세상에 살아온 것 같다. 형이 거친 들판에서 사냥꾼들과 맹수에게 쫒기는 들짐승처럼 살아왔다면 나는 집안의 가축처럼 편안한 삶을 살아왔다. 자신과 가족의 양식을 위해 늘 불안한 삶을 살았던 형과 달리 나는 때마다 주어지는 먹이를 먹으며 오늘에 이른 것 아닌가 싶다. 작은형만큼 남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않고 살았을까. 세월이 흐르면 어떤 기억으로 나를 아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남으려나.
두 시간 반여를 달려오니 내 삶의 터전이다. 다 잘 했느냐는 아내의 말에 모든 게 좋았다고 대답한다. 기대하지 못했는데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는지 두 분 목사님과 교우들이 위로 차 찾아와 예배를 드려주었고, 교회의 예식에 따라 내가 집전해서 모든 게 은혜롭게 진행되었다고 했다. 일상으로 돌아오니 차안에서 하던 큰형의 한마디가 귓가에 쟁쟁하다.
“넷 중에 하나가 갔구나.” 외로움과 서글픔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