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憂 暫 喜 膽 (우 잠 희 담)
16장 憂 暫 喜 膽 (우 잠 희 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憂]이 가득하였도다”
너희는 출교를 당할 것이고 심하면 죽임도 당하리라, 그때에 너희를 죽이는 이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그 때에 생각나게 하려 함이요 이제야 말하는 것은 지금까지는 내가 너희와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너희를 박해하고 심하면 죽이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고 또 하나님께로 간다고 하니 너희가 근심이 가득한데 실제는 내가 가는 게 너희에게 유익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 온통 혼란스러울 뿐이다. 그냥 지금까지처럼 자기들과 함께 계셨으면 좋겠다. 미래를 모르고 변화는 불안하다. 어떤 기기를 성능이 더 좋은 새 것으로 교체해도 처음에는 어색하고 서툴러 옛것이 더 좋게 느껴진다. 분명 더 좋아지려 병원을 가지만 겪을 일이 불안하기만 하다. 제자들은 주님이 안 계신 앞날이 너무도 불안해 하나같이 근심이 가득하다.
憂(근심 우)는 頁 + 冖 + 心 + 夂다. 頁(머리 혈)은 아래 八모양이 생략되었다. 다른 여러 부분과 결합될 때 일부가 생략되는 현상은 자주 나타난다. 머리 곧 얼굴을 가리킨다. 冖(덮을 멱)은 얼굴 아래 심장 위를 덮고 있으니 어깨를 비롯한 상체를 뜻하는 듯하다. 心(마음 심)은 중심부분이요 마음이다. 夂(뒤쳐져 올 치)는 마음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부분으로 천천히 뒤쳐져 걸어오는 모습이다. 마음이 쓰이는 걱정거리가 있다는 표현이다. 그것이 얼굴과 상체와 걸음 거리에 드러나 보이는 것이 憂다. 이 시기에 제자들을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는 혼돈과 우울과 불안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가라앉은 상태였든지 이런 것을 참지 못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까지 잠잠하다. 주께서 다시 살아나시고 성령이 오신 후에야 마음(心) 속에 성령께서 계시니 기쁨과 희망이 늘 있어서 憂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조금[暫]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제자들은 조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을 둘러싸고 돌아가는 긴박한 흐름 속에 ‘태풍의 눈’같은 순간을 살고 있었다. 팽팽하게 불어진 풍선 같은 터질 듯한 긴장감이 있었다. 그 가운데 시간이 멈춘 고요를 그들은 통과하고 있다. 주님만 알고 계신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며칠을 겪어내야 한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임신한 여인에게 출산의 순간과 같은 때가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출산 전후 여인의 감정과 상황은 너무도 다르다. 예수님도 그 때가 두렵고 고통스러우셨다. 오죽했으면 ‘아버지여 이 때를 면하여 주소서’하시고 그 순간에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본능적인 외침을 쏟아내셨을까.
暫(잠시 잠)은 車 + 斤 + 日로 되어있다. 車(수레 거,차)는 수레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서 차축과 굴대와 탑승공간을 보여주고 있다. 斤(도끼, 날 근)은 도끼 혹은 자귀를 표현한 것이다. 斤에 丶하나를 더하면 斥(척)이 되는데 물리치거나 내친다는 뜻이다. 車와 斤이 합쳐져 斬이 되면 벤다는 의미의 글자가 되니 곧 죄인을 처형하는 것이다. 수레에 싣고 가 도끼나 칼날로 처리하니 죄인을 처단하는 것이다. 말 같은 짐승이 끄는 수레에 사지와 머리를 묶어 처단하는 것을 거열형 혹은 차열형(車裂刑)이라 했는데 車를 두 가지 음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日(날 일)은 해를 상징하는 것이니 하루 혹은 일 년을 뜻했다. 지구의 자전을 생각하면 하루요 공전을 생각하면 일 년이다. 日이 부수가 되면 대개 시각과 일기에 관련이 많았다. 고대로 갈수록 죄인의 처형은 많은 이들에게 공포심을 주는 통치술로의 의미가 있어 거주민들이 모여 지켜보는 가운데 행해졌다. 그러려면 자연스레 넓은 시장통 같은 곳에서 낮, 곧 해가 떠있는 동안에 이루어졌다. 처형의 순간은 짧았다. 기다림이 길지 실행은 잠깐이다. 높은 산의 등반도 과정이 길지 정상에 머무는 것은 짧다. 그것을 나타낸 것이 暫이라 생각한다. 잠깐의 결정적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의 쾌락을 위해 죄를 지을 수는 없다.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喜]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주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신 후로는 다시 고통당하시지 않는다. 여인이 한 아이의 출산을 위해 거듭 그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성도들의 영원한 기쁨의 원천이다. 출산을 앞둔 여인이 근심하다 아이를 낳은 후에는 그 아이로 인해 기뻐하듯이 예수님도 죽으심과 부활을 기점으로 근심과 기쁨이 자리바꿈을 한다. 주님은 그것을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신자들은 더 이상 죄를 사함받기 위해 구약시대처럼 짐승을 잡아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예수께서 온전한 제물이 되사 한 번에 영원한 효력이 있는 완벽한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물질과 시간과 자신을 드리는 것은 지은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를 사하시고 하늘백성 삼아 주신 것이 감사하고 기쁘다는 고백으로 드리는 것이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변할 수 없으니 우리 죄 사함 받고 하나님 자녀된 것이 변할 수 없다. 이 근원적 기쁨이 어떤 환경에서든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바탕이다. 이 기쁨이 주님을 영접한 후로 영원토록 이어지는 기쁨이다.
喜(기쁠 희)는 壴 + 口다. 또 壴(악기 이름 주)는 屮 + 豆다. 屮(싹날 철)은 땅 속에 뿌려진 씨가 뾰족하게 땅위로 솟아오른 모습이다. 豆(제기, 콩 두)는 제사에 쓰는 술이나 고기 등을 담는 그릇이다. 평소에 콩을 담아두기도 했는지 나중에는 아예 콩이라는 뜻이 되기도 하고 그릇은 木이 더해져 梪로 쓰이기도 하고 콩은 荳로도 썼다. 형태가 받침대가 있고 두드리는 공간이 있는 북과 유사해 壴와 혼용되기도 했다. 북과 입이 더해져 북을 치며 노래하다, 입에서 북소리를 내다, 북을 치며 소리 지르다 같은 의미가 되어 모두가 즐거움을 표현해 즐거움을 나타내게 되었다. 성도들은 주님과 하나님을 생각하면 늘 감사하고 즐겁다.
“환난을 당하나 담대[膽]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으니 신자들도 세상을 이길 것이다. 신자들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이 계시고 주께서 신자들을 위해 하나님 우편에서 눈물로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계시지 않는 제자들은 얼마나 두렵고 불안하며 우왕좌왕하고 지리멸렬할까. 그들의 평소 모습을 떠올려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향해 주님은 膽大(담대)하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그들은 두려워서 바깥 활동을 하기보다 문을 닫고 함께 모여 있다가 베드로의 선동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물고기를 잡으러 갈릴리로 갔다. 물고기를 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목적은 숨 막힐 듯 답답한 예루살렘을 벗어나 갈릴리의 시원한 바람과 공기를 쐬어보는 것이었으리라.
膽(쓸개 담)은 담, 담력을 나타내는 말로 겁이 없고 용감하게 행하는 것을 담이 크다고 한다. 膽은 月 + 詹인데, 月은 肉(고기 육)이 부수로 글자 내에서 다른 부분과 함께 사용될 때 변형되어 나타나는 꼴로 자주 육달월이라고 불리며 부수로 사용되면 고기 혹은 신체의 일부를 나타낸다. 詹(이를, 볼 첨)은 쌀 포(勹)와 기슭 엄(厂)이 상하로 합해진 우러러볼 첨 혹은 위태로울 위에 여덟 팔(八)과 말씀 언(言)이 합쳐진 것이다. 그러니 합치면 겁 없이 담대함을 갖게 하는 신체 기관 곧 쓸개가 되고 또는 가파른 언덕, 곧 눈에 띄는 높은 곳에 앉아 여러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다. 성도들 각자는 이런 담대함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주께서 각 사람에게 베푸신 은총과 놀라운 일들을 회상하고 성령께서 강하게 하심을 힘입으면 누구나 담대하게 변화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성도들도 걱정[憂]스러운 때가 많이 있다. 큰일을 앞두고 특히 그러하다. 그렇지만 그런 순간은 잠깐[暫]이다. 그 때가 지나면 기쁨이 밀려온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근본적인 기쁨[喜]이니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다. 이 기쁨과 함께 성도는 결정적인 일에 승리한다. 주께서 승리하셨고 성령으로 담대함[膽]을 주시니 그것이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