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과 한자

15장 葡 實 友 惡(포 실 우 오)

변두리1 2019. 9. 26. 16:07

15葡 實 友 惡(포 실 우 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주님은 자신과 하나님 그리고 성도들의 관계를 아버지는 포도원 농부 자신은 포도나무 성도들은 가지라고 말씀하셨다. 농부가 돌보지 않는 포도원은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었다고 했다. 포도나무가 제대로 자랄 수 없는 환경이다. 예수님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다고 하셨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것만 말하고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일만 한다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하신다고 했다. 포도원이 잘 정리되고 나무가 열매 맺기에 부족이 없다는 것이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있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나무가 알아서 하고 농부가 열매 맺도록 수고하고 애쓴다. 포도는 과일로 맛있고 발효를 거친 포도주로도 쓸모가 다양하다. 포도주가 없는 이스라엘을 상상하기 어렵다. 하나님과 세상에 성도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葡(포도 포)+ + . (풀 초)는 풀을 나타내는 부수 가 글자의 일부를 이룰 때 변형되어 쓰이는 것으로 글자의 의미가 식물(植物)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쌀 포)는 배가 불룩한 여인의 옆모습을 그린 것으로 무엇인가를 둘러싸거나 포장한다는 것이다. (, 무리 보)는 무리를 이루거나 규모가 크다는 것으로 + 혹은 인 듯하다. (쓸 용)은 고대에 점을 칠 때 사용하는 뼈를 그렸다고도 하고 희생으로 드릴 소를 가두어두던 우리를 그린 것이라고도 한다. 그 자체로 여럿, 쓸모의 의미가 있다. 거기에 이 더해졌다면 쓸모나 수효가 많다는 것이요, 라하면 성인으로 큰 힘을 쓸 수 있다는 의미겠다. 포도를 생각하면 유용한 과일로 껍질로 싸여있고 한 송이에 수많은 알이 모여 있는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그것을 나타낸 것이 , 가 나타내주는 의미다. 한 알 한 알의 역할도 분명하지만 재배 수확 거래가 송이 단위로 이루어져 무리로 뭉쳐있는 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성도들의 특성과 쉽게 연결된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씨 뿌려 거두는 계절에 수확이 없는 것처럼 부끄러운 일이 있을까. 포도원 품꾼 비유가 성경에 있다. 때가 되었는데 품꾼을 쓸 일이 없는 것도 큰일이다. 한동안 이 열매를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이라고 많이 생각했다. 열매를 맺는 것이 전도의 결과로 신자들이 늘어나는 것이라 생각하고 여기저기서 그런 말씀들이 선포되었다. 교회성장학 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했고 그 영향으로 목회자들도 동조했다. 잘못됐다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균형을 잃을 가능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성도의 내적 성장을 염두에 둔다면 성령의 열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신자들이 많은 큰 교회 때문에 영광을 받으실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을 확률이 더 크다. 오늘날 사회로부터 큰 교회들이 지속적인 질타를 받는다. 같은 잘못을 해도 더 잘 눈에 띄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사람이 많이 모이면 그 자체로 힘이 생기고 그 힘을 이용하기 원하는 이들이 모여든다. 힘과 이권이 있는 곳에 의견의 불일치도 나타나기 쉽다. 오히려 성숙한 성령의 열매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함이 더 합당하고 자연스럽지 않은가. 주님으로 인해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려 더 힘쓸 일이다.

  實(열매 실)+ + 로 되어있다. (갓 머리, 집 면)(집 가)의 머리 부분으로 글자의 일부로 사용될 때 쓰이는 형태로 집 혹은 가정을 나타낸다. (꿸 관)은 여러 개를 끈 같은 것을 사용해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니, 늘어나고 증가하는 걸 보여준다. 는 화패로 사용된 유용한 것이니 집에 유용한 것이 늘어나 넉넉해지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원래 (밭 전)으로 되었다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밭에서 화패가치가 될 수 있는 것은 농산물일 것이니 곡식이나 채소일 것이다. 곡식이나 채소가 풍작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어떤 영역이든 내적 혹은 외적으로 유용한 것들이 풍성하고 넉넉해지는 것을 이라 하겠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

  주님은 마침내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 주시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최대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 하시며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우리에게 알게 했다고 하셨다.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친구 된 우리는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향해 친구라고 하기는 애매하다. 마치 손님을 초대한 주인이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시라고 할 수 있지만 손님이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먹겠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주님이라고 부르는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자신을 종이라 부르는 게 자연스럽다. 주께서 우리를 격상시켜 주신 것이다. 자신이 몸 버려 피 흘려 우리 위한 속죄의 희생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화해를 이뤄주셨다. 주님을 통한 하나님의 자녀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황송한데 친구라고까지 불러주시니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다.

  友(벗 우)에서 를 제한 오른 우에 (또 우)를 더한 것이다. 앞의 글자도 오른 손을 그린 것이고 도 오른 손을 표현한 것으로 서로 오른 손을 나란히 한 모습, 두 자를 위아래로 나란히 쓴 것이 의 원형이다. 벗을 나타내는 또 다른 글자인 (, 무리 붕)은 조개 다섯을 묶은 두 줄을 그린 것으로 함께 어울려 다니는 것을 표현한 듯하다. 이 좀 더 눈에 보이는 외적이고 환경적인 것이라면 는 내적이고 정적인 것 같다. 朋黨(붕당), 友情(우정) 같은 어휘가 그런 일면을 보여준다.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주님도 이 땅에서 많은 미움과 핍박을 받았다. 자신들과 같지 않고, 그들의 기득권을 위협할 때, 불안해하며 그 대상을 미워하고 제거하려 한다. 바르게 산다고 모두의 칭송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 일로 기득권이 약회되고 손실을 입는 이들의 미움을 받는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견고한 지위와 권위가 약회되고 민중들의 지지가 떠나려 하자 예수님에 대한 악의적 소문을 퍼뜨리고 사회적 처벌을 위한 증거 잡기에 몰두하다 여의치 않자 불법체포를 거쳐 허술한 심문과 재판으로 법정최고형인 십자가처형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섭리가 이루어졌다. 말씀이 성취되었다.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성도들도 세상의 미움을 받을 것을 아셨고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셨다.

  惡(미워할 오)+ 이다. (버금, 추할 아)는 고대의 주택 구조를 그렸다고도 하고 무덤의 묘실을 나타낸다고도 한다. 어떤 이들은 등이 굽은 모양이라고 하기도 한다. 의미는 첫째가 아닌 그 다음’, ‘추하다, 나쁘다등이다. 성경적으로 풀이하면 위아래가 막히고 그 안에 십자가가 감추어져 있으니 나쁜 것이요 악한 것이다. 또한 글자를 크게 보면 왕()이 되니 교만이 가득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교만이니 좋게 여겨질 리가 없다. 은 심장을 본떴다고 한다. 한자가 만들어지던 시기에 어떻게 심장의 생김새를 알았을까 하지만 그것은 이유가 충분하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제정일치의 신정사회로 가장 중시하는 것이 제사였다. 한자와 중국의 고대사에서 제사와 점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제사의 희생 제물로 동물이 자주 드려졌는데 그것들을 다루는 과정에서 해부하는 일이 많았을 것이고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으니 능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심장이 사람의 중심이요 생각의 출처로 보아 마음, 중심이란 뜻이 되었으리라. 그러므로 이 합해져 을 이루고 악할 악, 미워할 오가 되었음직하다.

  주님은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그 농부시다. 가지된 신자들은 나무에 붙어있기만 하면 열매[]를 맺는다. 외적 열매도 중요하지만 내적 충실을 기하는 성령의 열매를 넉넉히 맺자.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라 불러주셨다. 주님의 친구가 되는 것은 세상의 미움[]을 각오해야 하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