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하버드법대 종신교수 석지영의 성장기 -
본인은 싫어하지만 ‘엄친딸’이 맞을 게다. 삼십대 후반에 세계 제일의 대학 그것도 법대 종신교수가 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아무리 모든 게 다 갖추어져 있다 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리라. 예일대와 옥스퍼드를 거치며 문학박사가 되고 법에 흥미를 느껴 다시 하버드에서 법을 공부하고 실무를 거쳐 하버드의 교수가 되고 마침내 종신교수가 된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에 가서 많은 불리한 여건을 딛고 이룬 것들이어서 더욱 돋보인다. 본인의 노력이 기본이 되었겠지만 부모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도움과 여러 교수분의 도움이 결정적이었을 게다.
때로 학습에 흥미를 잃고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적도 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일도 있다지만 마음이 가는 분야에는 지독하게 열심히 했음을 알겠다. 도서관에 재미를 붙이고 책들을 빌려와 며칠이 안가 다 읽어내고 시와 소설에 탐닉한다. 유대인 2세인 랭 선생에게 피아노를 배울 때도 그 엄격한 가르침을 소화해낸다. 더욱 놀라운 건 아메리칸 발레 학교를 두고 지속적인 정보를 수집하고 어머니를 설득해 오디션을 보고 합격을 할뿐 아니라 발레를 전공할 이들도 어려운 최고의 단계까지 진급을 하는 집념이다. 부모의 반대로 발레를 포기한 걸 두고두고 후회하지만 그 수준에 이른 것만 해도 가능성과 의지를 충분히 보여준 것이다.
줄리어드 예비학교에 입학을 하고 졸업에 이르기까지의 과정도 술렁술렁 넘어갈 수 있는 건 전혀 아니었을 게다. 각각 더없는 전문적 분야에서 손꼽는 수준까지 올라가 본다. 결심하고 노력하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고교에서 그런 재능을 몰라볼 리 없다. 교사들은 예일대를 권했다. 본인은 합격할 수 있으랴 했지만 주변인들은 가능성을 보았고 학교는 선발해 주었다. 교수 중에는 재능을 알아보고 격려하는 이가 있었고 더 분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졸업에 이어 마샬 장학생에 선발되어 영국 옥스퍼드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한다. 스물여섯에 박사가 되고 논문이 옥스퍼드 출판부에서 책으로 나왔지만 자신에게 잘 맞는 법학으로 분야를 전환한다.
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어느 수준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다른 분야로 옮긴다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닐 텐데 그것도 하버드대에서 다시 도전을 한다. 그 어려운 과정을 거쳐 졸업을 하고 다시 도전하여 교수가 되고 종신교수에까지 오른다.
결혼도 쉽지는 않았다. 양측에서 서로 한인이 아니라서, 유대인이 아니라서 반대가 심했단다. 결국 당시 국무부 인권담당 차관보였던 헤럴드 고(고홍주)의 주례로 양가 가족들이 함께 해 결혼에 이르고,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가정을 꾸린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있었으랴. 출산과 육아를 하면서 전문직을 갖기가 만만했을 리는 없다. 또한 열정적으로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주제로 논문을 쓰고 책으로 출간하는 일도 그냥 되는 건 아닐 게다.
책의 첫 부분부터 ‘그래 당신은 잘 났다. 대단한 부모에 우수한 유전자를 타고 났구먼’하고 생각할 수 있다. 아버지가 잘 나가는 의사니 뭐 걱정할 게 있겠냐 싶기도 하다. 여러 가지 일들을 해내는 걸 보면 그럴 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엘리트 과정을 거쳐 성공했으니 어쩌란 말인가. 특별한 신의 은총을 받은 이들을 인정하고 축복하자. 세상에 다양한 이들이 수없이 많으니 그런 이들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일이 무언가. 그들이 할 일이 있고 또 평범한 이들이 할 일이 있다.
평범한 이들이 그들을 흉내 내기 어렵듯이 우리만 할 수 있는 일들도 많이 있다. 평범한 일상을 누려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왜 그들에게는 없겠는가. 하늘을 나는 것 같은 소수 그들의 삶과 땅에 붙어사는 다수의 삶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면 나는 여전히 다수와 삶인 땅의 삶을 택할 것이다. 한 사람이 모든 삶을 살아볼 수는 없다. 살아보지 못한 삶, 가보지 못한 길이 아쉽고 부러울 수 있지만 내게 주어진 길을 자박자박 걸어가는 것 또한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
개인적으로 재능은 타고나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생래적인 재능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다. 주어지는 것이요 타고 나는 게다. 재능의 분야뿐 아니라 정도까지 개인이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건, 개인차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같은 노력을 해도 결과가 다를 수 있음을 수용하는 게다. 자신의 부진을 합리화하려고 이런 논리를 사용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잘하는 이들을 인정하고 열심히 해도 바라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논리로는 타탕할 것이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가 판단해야 한다. 모든 가능성을 다하라는 것은 가혹하다. 스스로 힘껏 했다면 결과를 떠나 후회가 남지 않을 게다. 모든 동물이 코끼리는 아니고, 고래처럼 다 바다에 사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하늘과 땅과 물속에서 동물과 식물로 한데 어울려 살아가니 조화로운 세상을 이룬다. 그럴 때, 생태계가 이루어지고 먹이사슬이 만들어진다. 백수의 왕이라는 호랑이가 살아서는 뭇짐승을 사냥하지만 죽은 후에는 미생물들의 먹이가 된다. 공평하지 않은가. 결국 모두가 자신의 길을 가는 게다. 그들은 케임브리지에서 우리는 여기서 동시대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