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한 가정이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50일간 유럽의 미술관을 돈다. 책을 낸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고 자신이 잘 하는 것이고 아내도 좋아하고 아이들에게 교육적 효과도 기대할 수 있으니 좋겠다. 현실적인 어려움에 직면하는 일이 적지 않겠지만 공짜로 얻어지는 게 어디 하나라도 있던가. 미술관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유럽의 미술관이니 신화와 기독교, 인류 사상의 흐름을 확인해 볼 수 있으려나.
화가들의 삶도 같지는 않는가 보다. 궁정화가가 되어 인정받고 후원아래 활동하는 이들도 있었고 교황청의 인정을 받아 유명한 성당에 작품을 남긴 이들도 있다. 반면에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고 가난과 갈등 속에 활동하다가 사후에 크게 각광을 받는 이들도 있다. 현대로 오면서 미술품이 투자가치로 인식되면서 몇몇 화가들은 부와 명예를 함께 누리기도 한다. 한 가지 잣대로만 또는 한두 마디로 평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많은 작품들이 고대 신화와 성경 내용을 품고 있다. 작가의 작품들이 그 시대와 무관할 순 없으니 삶의 모습을 치열하게 보여준다. 시대마다 고민 속에 만들어진 작품들이 수집되어 어느 순간 번듯한 건물에 전시가 되고 많은 이들이 그것을 보러 찾아온다. 그림과 조각 속에서 어떤 감동과 영감을 받는 것일까. 수천 년 전의 작품을 보며 시간적 심리적 거리감 없이 감명을 받을 수 있음은 왜 일까. 인간 공통의 그 무엇이 있음이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아름다움을 보는 근본적인 본성과 감정이 크게 다르지 않음이다.
고대 신화에서 아프로디테가 비너스와 다르지 않다. 여러 비너스의 작품을 통해 보려주려는 것이 당대의 이상적인 여성상일 게다. 그것이 기독교로 들어오면 성모상이 되었을 것이다. 성모상이 변화를 겪는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표현되는 모습이 다르다. 신화의 대표적 남성이 아폴론이라면 성경의 어울리는 인물은 다윗일 게다. 그들은 인류에게 끝없는 상념과 영감을 주고 있다. 아마도 인류사와 끝까지 함께 할 것이다.
많은 작품들을 설명하고 있고 읽고 보았다. 그 중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 있다는 베아타 베아트릭스가 잊히지 않는다. 명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화가와 모델로 만나 결혼하고 결국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고도 그리움 속에 그린 작품이어서 인가 혹은 14세기 초반 신곡을 기록한 단테와 그의 연인 베아트리체가 연상되어서인가. 그 그림의 잔상이 너무도 강하다. 초록색 상의와 인상적인 목과 길고 탐스러운 머릿결, 꿈꾸는 듯한 표정이 몽환적이다.
스위스 바젤 미술관에서 소개된 오디세우스와 칼륍소도 인상적이다. 거대한 바위를 사이에 두고 칼륍소는 오디세우스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오디세우스는 바다를 보는 뒷모습을 보이고 있다. 바다에서 표류하다 섬에 도착한 오디세우스를 칼륍소는 7년 동안이나 머물게 한다. 영원한 삶 재물 권력으로 설득을 하지만 이타카의 집과 아내 페넬로페를 그리워하는 그를 끝내 단념시키지 못한다. 앞에 펼쳐진 하늘과 바다, 그것을 깊은 생각에 잠겨 바라보고 있는 약간 구부린 넓은 어깨와 긴 머리가 고독과 완강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디에도 편안한 삶은 없다. 바르다고 생각되는 곳을 향해 끊임없이 가보는 게다. 10년을 끈 지루한 전쟁이 그러했고 놀라운 지략으로 승리한 후에도 또 모든 부하들을 잃고 10년이 걸려 귀향하는 삶이 그러하다.
오스트리아의 벨베데레 궁 미술관에서 소개된 클림트의 두 작품, 키스와 유디트1 도 강렬하다. 빛나는 금빛 색채와 찬란함이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으리라. 그 빈틈없는 키스의 숨 막힘과 논개를 연상시키는 유디트의 삶과 그녀에 대한 화사한 표현을 보는 내내 꿈꾸는 것 같다.
로댕과 고흐가 내 삶에 한층 다가온 느낌이다.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가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로댕의 천재성과 폭넓은 작품들을 책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불우한 삶을 산 고흐, 자신의 그림에 평생 만족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림에서처럼 흔들리는 마음으로 산 것은 아닐까. 그나마 혼으로 이어졌다고 할 동생 테호가 삶의 의지요 위안이었으리라.
화가들은 왜 그렇게 혼신을 다해 작품을 만들며 살아갈까. 고통과 절망의 순간들이 많았을 텐데, 무엇을 그들로 버티게 했을까. 누군가 자신의 창작열이 부족함에서 온다고 했는데 결핍과 불안이 그들로 더욱 창작에 매달리게 했는지 모른다. 그들은 자신의 온몸을 던져 한 줄기 빛을 인류에게 던져준 또 다른 프로메테우스들일 게다.
사고의 물길이 막히면 음악 미술 자연으로 돌아간다. 멍하니 그들을 듣고 보고 있노라면 막힌 길이 뚫리는 느낌이 든다. 관객의 편의를 위해서인지 몰라도 때로는 미술관과 박물관의 너무 많은 작품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피곤하게 한다. 원래의 자리에 있어 오롯이 그 작품을 보며 사유에 여유를 주어야 하는 걸, 미술관 관람도 일인 양, 그 위대한 작품들을 힐끗힐끗 한번씩 눈길 주고는 경보하듯 지나지는 않았는지 민망하다. 차라리 책으로 보는 게 더 여유롭다.
글쓴이의 두 아들이 셋이 되었단다. 부부도 나이가 적잖이 들었을 게다. 그 가족이, 아이들이 50일간의 행복한 추억을 오래 간직하고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