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
말과 글
혼자서 긴 시간을 말하지 못한다. 장악력이 부족하다. 여럿이 이야기를 하다보면 제 때에 끼어들지 못해 하고픈 말을 못하는 수가 있다. 그런 때는 다음에 해도 되고 안 해도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한다. 주변사람들은 나에 대해 오해를 적잖이 하는데, 같이 어느 정도의 세월을 보내고 나면 해소가 되는 것 같다. 운동이나 게임, 음악이나 여행 같은 일에 잘 나타나지 않고 그냥 듣는 일에 그나마 모습을 보이니 배우는데 열심히 있다고 여긴다.
내가 짧은 글을 가끔 쓴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무얼 좀 알거나 꽤 가방끈이 길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어 어떤 일에 별 말이 없으니, 혹시 다른 의견이 있나 해서 묻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면 잘 모른다고 한다. 여러 번 반복되니 이제는 유별난 생각이 없다는 걸 안다.
즉석에서 나온 의견에 반대를 하며 첫째 둘째 셋째를 꼽는 이들이 존경스럽다. 게다가 들어보면 수긍이 가고 과히 틀리지 않는 듯하다. 내가 대강 성장과정도 알고 생활을 웬만큼 아는 이들이 그렇게 노력하지 않는 것 같은 데, 아는 게 많고 말을 잘하는 이들이 있다. 그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책을 읽고 신문도 보는데 할 말이 별로 없다. 좌중을 압도하며 단 십 분이라도 자신 있게 말을 하거나 대화를 주도하고 싶지만 그게 되지 않는다.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개인적 판단으로는 사회분야의 기본개념이 없어서가 아닐까 한다. 일반상식이 역사와 지리 경제 문화 정치이니 하나같이 사회부문이다. 이런 지식들은 서로 연계되면 단단해지고 종합이 되는데 그러려면 기초적인 위치를 나타내는 지리개념이나 테두리가 된 역사개념이 필요하다. 돌이켜보면 내 가문이 이런 지식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았고, 누구도 그런 언급을 잘하지 않았던 듯하다. 선천적인 재능으로 타고나기라도 했다면 좋았겠지만 유전자 조합에도 그런 행운은 없었나보다.
비유하면 그물코가 잡히는 물고기를 결정한다고 할 게다. 정밀해야 들어온 고기들이 빠져 나가지 못한다. 너무 엉성하면 힘들여 물고기를 몰아도 뭔가 잡힌 것 같아 그물을 건져 올리면 다 빠져 나가는 형상이다. 신문에서 읽어도 어디서 일어난 것인지 곧 잊어버린다. 현재의 일을 잘 분석해야 앞일을 예상할 수 있고, 과거를 알아야 그 사건의 근원을 알 텐데, 그것이 안 되니 기억 속에서 귀찮고 복잡해 삭제해 버리는 게 아닌가 싶다.
투자에 비해 효율이 떨어지는 게다. 전에는 듣기만 하고 발언을 하지 않으면 입이 무겁다거나 겸손하고 점잖다고 인정해 주었는데, 이제는 실력이 부족해, 자제가 아니라 못하는 거라는 게 드러나니 대하는 눈초리가 예전과 다르다. 나도 그런 자리가 불편해 잘 가지 않는다. 그래도 교회에서 설교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중간을 가로채거나 중단시킬 이 없고 일정 시간이 있으니 간단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에겐 놀라운 적응력이 있어 얼마가지 않아 성도는 목사의 설교에 적응을 한다.
잘하면 잘하는 대로, 그렇지 않으면 또 그런대로, 길든 짧든 형태와 내용이 어떠하든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물어보았다. 설교를 지금대로 하는 것과 더 오래하는 것 중 어느 걸 원하느냐 했더니 지금대로 하잔다. 누군가 성경연구를 많이 해서 설교에 치중한다기에 나도 그렇게 해야 하는가 했더니 그렇지 않다니 다행이다. 혹시나 예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설교에 별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닌가 하는 기우가 들기도 한다.
글은 다르다. 말은 다른 이가 하고 있을 때, 치고 들어가기가 어렵지만 글은 언제나 혼자 주도적으로 쓸 수 있고 누가 끼어들지도 않는다. 말은 시간의 문제도 있고 시선이 부담스럽지만, 글은 내가 쓰고 있는 걸 다른 이가 모른다. 이야기하거나 발표하는 순간까지 비밀이다. 어찌 쓰건 쓰는 이의 자유다. 스스로 작가라는 즐거운 상상에 빠져 있어도 누구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 얼마나 유쾌하고 즐거운 일인가.
유명해지기 전에는 아무도 독촉하거나. 보여 달라고 조르지 않는다. 또한 쓰는 만큼 편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많이 쓰고 오래 썼다고 글이 줄줄 나오는 건 아니지만 두려움은 줄어들고, 자신감이 차오른다. 문제는 양이 아니라 질이다. 그 분야의 전문가나 혹은 여러 사람들이 보고 인정할 수 있느냐 인데, 그것도 마음을 비우면 안달하지 않을 수 있다. “첫술에 배부르랴”는 속담을 생각한다. 처음부터 뛰어다닌 이가 누구인가. 뛰기 전에 걸어야 하고 걷기 전에 서야하고 서기 전에 기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연습과 실수 없이 할 수 없고 그 과정마다 요구되는 게 연습이다.
물오리도 물에 고요히 떠있으려면 물속에서 무수히 발을 움직인단다. 편안해 보여도 쉼 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사회지식이 없어 상식이 허당이고 제대로 알지 못해 남 앞에서 설득력 있게 말하지 못한다는 게 변명이요 핑계임을 모르지 않는다. 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없다한들 꾸준히 노력하면 중간이라도 갈 게 아닌가. 스스로 게으름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이다. 글도 그렇고 말도 다르지 않다. 노력하지 않고 어느 경지에 오르고 싶다는 건, 감나무 아래서 잘 익은 감이 잘 씻겨 내 벌린 입으로 정확히 떨어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처럼 허망한 일이다.
자신을 속이기는 어렵다. 어쩌다 스스로 각성을 촉구하는 셈이 되었다. 내 기대만큼 말과 글이 따라주었으면 하는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