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살 것인가
어디서 살 것인가
지은이의 학력과 경력을 보니 대단하고 활동도 근사해 큰 기대를 가지고 책을 읽었다. 식견과 통찰이 상당하다. 원체 문외한이기도 하지만 잘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설득력이 있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하는 근거들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건축이 많은 것을 품고 있고 알려준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건축과 함께 세상이 달라져 왔고 발전된 기술이 건축에 오롯이 사용되어져 왔음을 보여준다.
우리의 역사가 보일러의 사용과 함께 크게 달라졌다는 게 흥미를 끈다. 그 이전의 난방시설이 온돌이고 그로인해 고층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는 게다. 겨울이 추운 기후조건에서 난방이 되지 않는 주거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게다. 세계적으로 도시에 일정 이상의 인구가 상주해야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도 수긍이 간다. 보일러의 보급과 함께 고층건물이 들어서고 주거시설이 밀집할 수 있어 도시화가 되고 상주인구가 늘어나 민주화가 가능했다는 얘기다. 시위의 형태도 집단지성이었던 대학생 중심에서 일반 시민으로 옮겨가게 된 요인의 하나도 도시인구의 증가에 있고 그 바탕에 주거형태의 변화가 있었다는 설명도 가능할 게다.
고인돌을 비롯한 거대건축물의 용도에 대한 해석도 흥미롭다. 그 건축물들이 의아하기도 하고 수수께끼 같았었다.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마음이 인다. 그 주변에 그만한 세력을 가진 집단이 있었다는 걸 밝혀주었으면 더욱 좋았으리라. 그런 건축물을 세우는 게 허세나 낭비가 아니란 것도 신선하다. 손자도 그의 책에서 가장 좋은 게 싸우지 않고 이기는 부전승이라 했으니 그 건물을 보고 기가 질려 물러가면 바라던 효과를 충분히 얻은 게다. 미국이 소련과의 냉전시대 경쟁에서 승리한 후로 초고층 건물을 짓지 않고 오히려 국력이 그 정도가 되지 못하는 나라들이 과시용으로 짓고 있다는 설도 타당성을 느끼게 한다.
학교이야기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천편일률적인 형태, 그것도 교도소와 군대를 빼 닮았다는 게 얼마나 서글픈가. 전혀 창의적이지 않은 곳에서 창조적 인재가 나오기를 기대한다는 게 얼마나 불쌍한 일인가. 거의 12년을 같은 건물에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내용을 배우며 같은 음식을 먹고 이기와 경쟁에 익숙한 이들이 어떻게 창의적일 수 있을까. 그러니 사람들이 많은 대기업에 들어가거나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에 할 말이 궁해진다. 남들과 다르다는 게 창의로 가는 출발일 수 있다면 그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건 아니었나. 다르다는 걸 틀리다고 표현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도시의 공간에 대한 설명도 의미가 많았다. 전체가 함께 공유하기보다 사유화하는데 익숙하니 위축을 느낄 수밖에 없다. 대단위 아파트단지를 조성하고 문을 빼고는 담으로 둘러놓으니 그곳의 주민이 아니면 전혀 들어가지 못하는 공간이다. 변화가 있는 접근 가능한 공간이 아니니 그 근처는 가고 싶은 곳일 수가 없다. 도로도 차에게 빼앗기고 좁은 곳은 주차하기에 급급하니 누릴 수 있는 곳이 더욱 제한되어 있다. 주거환경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계급의식도 만만한 문제는 아니다. 그 배타적인 우리의식은 가정이 조금 확대된 게고 가정은 개인이 그것도 혈연을 매개로 조금 커진 것일 뿐이다.
그가 들려주는 주택단지 앞의 쇼핑몰과 상가의 도시적 의미는 놀랍다. 선이 아닌 점의 문화, 사람들의 왕래가 아닌 자동차로 지나치는 공간들, 한 곳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님을 느끼게 한다. 더구나 인터넷과 홈쇼핑의 발달로 인간의 수작업을 거치는 몇 분야 외에는 가게들이 급격히 사라져갈 거라는 예측은 믿고 싶지 않은 일이다.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이 자주 만나고 부딪쳐야 창조적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잊히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많은 일들을 거꾸로 하고 있을까. 추억의 공간들은 점점 사라지고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곳들을 빠르게 줄여가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자연과도 점점 멀어지고 사람들의 접촉을 어렵게 하는 고층건물을 짓고 그 안에 사는 걸 좋아하게 되었나. 이웃을 비롯한 사람들과 만나기보다는 화면에 더욱 몰입하고 애완동물을 반려로 여기고 생활하려는 경향이 더 짙어지는 것 같다.
건축을 통해 자연과 가까워질 수는 없는가. 공동체에서 벗어나 혼자가 되도록 부추기는 추세를 떨치고 함께 어울리는 문화로 나아갈 수는 없을까. 오랜 삶의 기반이었던 촌락이 무너지며 삶이 각박해지고 이웃을 잃고 외톨이가 되어온 게 우리의 반백년이 아니었던가. 주변 사람들과 단절하는 생활이 편리할 순 있어도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AI)에 의해 밀려날지 모른다는 염려도 밀려오는데 이래저래 우울하기만 하다.
인간은 적응과 대처능력이 뛰어나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면 해결책을 찾는데도 빠르다. 발전한 문명도 이러한 문제들을 풀어 가는데 크게 한 몫을 할 게다. 위기라고 외치며 살아온 것이 어제 오늘 만은 아니다. 땅에 근접해 천장을 높이하고 건물을 지을 일이다. 그때 창의성이 더 계발된다고 하지 않는가. 난방연료가 화목에서 기름으로 가스로 전기로 변화하면서 민둥산을 빠르게 푸르러졌다. 어떤 계기로 우리 환경이 달라지면 좋겠다. 어디서 살아야 하나. 유현준의 책에서 한 가닥 실마리를 찾을 순 없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