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와 안경
막내와 안경
생각보다 번거롭네. 왜 갈수록 복잡해지는 거야. 안경을 한 번에 맞추지 못했어. 내 잘못인가, 아닐 거야 아니지. 따로 마련된 방에서 육중한 기계 앞에 턱 올리고 오른편 왼편 눈에 여러 렌즈를 대 보았어. 눈은 나빠졌는데 도수 낮은 안경이 더 또렷이 보인다네. 비싼 테로 하라는 걸, 그 허영 덜어내느라 한 보름 늦췄지. 짐작엔 안경테로 장사하는 것 같더라고, 근거? 없지, 그냥 내 생각이야. 두 번째 가서 싼 테로 했지, 가능하면 조악하기 살기로 작정했거든.
한 스무날 전이었나 봐. 이른 아침에 성경을 읽고 있었어. 막내가 인사를 하다가 갑자기 왜 안경을 벗고 책을 보냐고 묻더라고.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고, 이제 가까운 건 맨 눈이 더 잘 보인다고 했지. 안경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냐고 재차 묻는 거야. 안경에도 약간 문제가 있었어. 안경을 오래 사용하니 가끔 안경닦이 천으로 닦는데도 잔금이 가는 거야. 삼사 년 된 것 같은데 꽤 많은 실금이 생겨, 써도 흐릿하니 자주 벗게 된 거지. 그걸 말했더니 그럼 시간 날 때 안경을 맞추러 가자네. 다초점이라 비싸대도 가자는 거야. 아내 것도 해야 된다 했더니 그러자고 하더라고.
언젠가 신문에 안경점 전단지가 들어온 적이 있었어. 그걸 보관해 두었지. 작년 추석 지내고선가 아내가 안경을 바꿔야겠다고 해 그걸 보여줬더니 연말쯤 가자는 걸, 대답만 찰떡같이 하고 못 갔지. 해가 바뀌고 오월이 왔어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네. 그러고 보니 지금 쓰고 있는 안경도 작은 애가 해준 거더라고. 그 때도 어버이 날인가 내 생일인가에 선물로 받았었는데….
몇 년 됐어. 애들한테 이런저런 신세지기 시작한 게. 두 해 전인가는 여행을 한 번 갔는데, 계획하는 과정부터 현지에서의 모든 것을 아이들이 하고, 나와 아내는 따라 다니기만 했지. 그래도 되나 몰라, 되겠지? 그렇게 했어. 편하긴 한데 기분이 조금 묘하데, 이렇게 밀려나는 거구나 싶더라고. 돌이켜보니 내가 자녀들에게 해준 건 별로 없어. 중학교, 고등학교 갈 때, 교복이나 맞춰 주었나, 아마 그것도 난 무심했고 친척 분들이 그 때마다 세뱃돈은 나우 주고 아내가 고생을 했을 거야. 교복 하는 데 따라간 기억이 없으니 말이지. 딸들이니 아내와 함께 가는 게 당연하다 핑계 대고 책임 회피한 것 같기도 해.
아이들은 커나가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자연히 방임하게 되더라고. 그걸 또 아이들은 고마워했어. 일일이 간여하지 않고 잘 하리라 믿어주었던 게 고마웠다고…. 작은 교회 목회자 자녀로서 늘 따라다니는 결핍과 부족이 얼마나 컸을까. 어쩌다 물어보았더니 그런 생각 못하고 셋이서 외롭지 않게 지냈다고 말해줘 고마웠지. 부모를 향한 위로였을까, 사실로 믿고 싶어, 그렇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해야지.
아, 그럼 나는 부모님께 어떻게 했던가. 아버지는 내가 학생일 때, 어머니는 내 나이 삼십대 초반에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이렇다 할 해드린 게 없네. 더구나 내가 막내여서 받는데 익숙하고 주는 게 서투르니 더 못한 것 같아. 말씀은 안하셔도 어머니는 아들 월급봉투 받아보고 싶어 하셨을 텐데, 언제부터였는지 통장으로만 들어오니 그것도 못해드렸지. 평생을 가난에 시달리며 사신 어머니께 선물 한 번 제대로 해드리지 못한 게, 마음이 아리네.
막내를 끔찍이 아끼셨던 아버지, 나 철없던 시절 한 순간 말 잃으시더니 두어 달 앓다, 그 먼 길을 말없이 떠나셨지. 짧은 세월 막내와 함께 사실 때, 어머닌 딸만 낳는 아들을 측은히 여기셨어. 속병으로 젊어서 술을 배웠다던 어머니, 부대에서 퇴근하며 구멍가게 들러 소주 한 병 어쩌다 사다 드리는 게, 무척 효도하는 일이라 여겼지. 교인들이 아주 가끔 집에 들러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면 교회에 다니지 않으시던 어머니가 곤혹스러웠어. 남에게는 전도하라 하면서 어머니도 교회로 인도하지 못하는 무능한, 말도 안 되는 목사라고 스스로 생각했지.
그 당시 내 나이와 지금 아이들 나이가 별 차이가 안 나. 부모님께 한 일을 생각하면 내가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지. 자격 있어서가 아니라 효도하며 자녀들 마음이라도 편하도록, 더해 내 형편이 그러니 사랑으로 고맙게 받는 게지. 내 삶은 어째 남의 도움만 받고 사는 것 같아. 집에서 큰 소리 한 번 치기 민망해. 그러니 웬만하면 내 주장 없이 하자는 대로 따라 살아. 안 돼 보여, 아니야 살만해.
막내가 자기 카드로 결제했지. 망설임 없는 당당한 모습이더라고. 맏이 차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다음 번 안경은 자신이 맡을 차례라고 예약을 하데. 그 때는 내가 수입이 좋아서 내 돈으로 했으면 좋겠다했더니 그래도 안 된다고 못을 박지 뭐야. 안 되나, 안 되나 보네. 마음 있으면 내 할 일이야 주변에 항상 있는 것 아녀?
그나저나 두 아이 혼사가 걱정이야. 둘째는 딸을 낳아 백일하고도 달포가 지나가는데, 이 일도 알아서 스스로들 해주면 좀 좋아…. 막내가 해 준 안경 쓰고 주변을 세세히 둘러보면 아내와 내가 사위들을 찾아낼 수 있으려나. 시원찮은 막내였던 아빠가 이제 기특한 막내에게 효도를 받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