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없고 억울할 뿐…
잘못 없고 억울할 뿐…
어쩌란 말인가. 그렇게 태어난 걸. 자신이 원한 바 아니고 선택한 적 없었네. 제 잘못 아닌 일로 설움 속에 갇혀 살다갔으니 안타깝고 끔찍하네. 부는 왕이 아니어도 모는 왕비 분명한데, 지하에 갇혀 하루하루 살았네. 엮여지는 이들마다 안 좋은 일 벌어지니 불행의 원죄처럼 대우받았네. 그도 운명 몰랐어라, 자기 생명 언제 어떻게 끝이 날 줄을….
그리스 로마 신화 읽던 중, 크레타 미궁에 갇힌 미노타우루스 생각하네. 생명 받아 세상에 오니 환영에 축하커녕 경악, 탄식 가득했지. 어찌 알았을까, 그저 열심히 힘줄 뼈 살 눈 코 입 만들기 바빴거늘. 그 모습 된 게 누구 허물인가. 그의 잘못 하나 없네.
욕망에 눈 먼 모친 허물인가, 욕망 넣어준 포세이돈 심술인가. 애초 약속 지키지 않은 겉 아버지 미노스를 원망할까. 구태여 헤아리면 사람 되어 신 능멸한 겉 아버지 허물 가장 크지. 예쁜 암소 올라탄 황소를 탓할 건가. 감쪽같은 솜씨 보인 다이달로스 책하려나. 파시파에로 넋 놓고 황소 보게 한 미노스의 허약함이 문제 아닌가. 굵고 긴 걸 갈구해 제 정신 놓아버린 왕비 잘못 전혀 없다 할 순 없지. 이치에 밝은 테미스, 정의로운 디케, 제우스, 파리스, 헤라까지 다 모아 물어도 미노타우루스 허물할 이 아무도 없고말고.
경악스런 파시파에, 황당한 미노스, 왕비 소생 죽일 순 없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가두려 하네. 다시 불려온 다이달로스, 자기도 못 나올 미궁을 만들었네. 먹이도 맘대로 못 하지, 타고난 대로 먹는 밖에…. 아테네 사람들 무슨 허물 있나, 약소국 국민인 게 죄일 뿐. 그 쪽도 바람피워 난 아들 테세우스, 그래도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왕의 아들이 희생제물 자청했다네. 그 마음 기특하고 떠날 땐 늠름해도, 열에 아홉 죽는 일에 떨지 않을 이 누군가. 죽더라도 그 용기 가상해라.
크레타에 엄마 닮은 딸 있으니 그 이름도 착착 붙는 아리아드네. 멋진데다 씩씩하고 용기 있는 테세우스 한 번 보고 사랑 병 걸렸네. 다이달로스로부터 묘안 구해 테세우스에게 전하네. 그래도 동생인데, 죽이라 칼을 주고 처음 본 왕자는 살아오라 실까지 주네. 제 나라 등지고 도망갈 때까지만 좋았을 뿐. 낙소스에서 잠자다 사랑을 잃었네.
미노타우루스가 언제 아테네 사람 먹이로 달랬나. 테세우스와 결판을 하자했나. 때맞추어 두어 번 먹을 것 받았을 뿐, 청년 장수에게 생명을 잃었네. 삶과 죽음 애달프네. 테세우스와 그 일행만 살판나, 너무 기뻐 돛 갈아다는 것 잊어버려 친부 아테네 왕도 죽고 말았네.
한 떼가 살아가니 약속대로 다이달로스 그 아들과 미궁에 갇히네. 다이달로스가 누군가. 쥐구멍에 볕들 날 있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 있다는데, 그냥 죽을 위인 아니지. 하늘보고 바닥보다 머리가 번쩍, 새의 깃털 모으고 밀랍 발라 날개를 짓네. 아들에게 날개옷 매어주고 창공으로 밀어내며 하는 말, 너무 태양 가까이 날지 마라 밀랍 녹으면 날개 잃고, 추락은 곧 죽음이란다. 알맞게, 치우치지 않기가 힘 솟는 청소년에게 쉬울 리 있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고, 알아도 못 참는 게 인간인걸. 아들 이카루스 태양열에 밀랍 녹아내려 바다로 추락해 죽고 말았네.
온갖 재난의 출발점 미노스도 죽음 면치 못했네. 떠나고 죽고 사라지는 모두가 비극이었네. 왕비 파시파에는 어찌 되었을까. 뒷이야기 없어도 능히 짐작하겠네. 섭리 거스른 흰 황소 처형되었을 테고, 경악스런, 사람도 짐승도 아닌 미노타우루스는 미궁에 갇혀 살다 테세우스에게 죽임 당했지. 두 딸은 적국 청년과 도망가고 남편죽고 무슨 수로 살았겠어. 스스로 목숨 끊어서라도 죽었을 테지.
해서는 안 되는 일 왜 그토록 하려했을까. 하나 같이 그걸 못 참고 일 저지를까. 그런 짓에 둘째라면 서러워할 위인이 제우스 아닌가. 윗물 그러하니 아랫물 어찌 맑을까. 그런 걸 다 제한다 해도 신화니 그럴 수밖에. 하지 말라는 것 안 하고 참고 견디면 무슨 사건 일어나고 파란만장한 희대의 일들이 벌어질 수 있을까. 질펀한 한 마당 펼쳐지려면 금기 깨고 극단으로 치달으며, 욕망 쫓아 불장난 벌이는 게지….
밋밋한 현실에서 짜릿한 욕망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는 게 신화고 문학 아닌가. 제 정신 가지고 삶에 찌들려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 향해 다가오는 모험 기회 피해 가고, 삶 틀에 덜 옥죄인, 조금은 제 정신 나간 어리숙한 이들이 오늘날 신화를 이어가네. 맨 정신으론 용기 부족해 디오니소스 힘 빌리고 얼마 못 갈 권력을 타고 앞날 재앙 뻔히 보며 다이달로스에게 은근슬쩍 손을 내미네.
누가 보아도 밋밋한, 넓게 포장된 곧바른 길에 무슨 신날 일 있겠나. 다들 나이 들고 용기 없어, 안정을 못 벗어던지고 좁고 험한 길 달려갈 열정이 식은 게지. 그게 오늘을 사는 그대와 내 모습이지.
누구한테 물어도 잘못 없고 억울한 미노타우루스 죽이고 엮인 이들 파멸로 몰아넣었네. 금기 어기고 타는 욕망 따라 허덕대는, 인간과 신들의 모습 속에서 리비도와 공격성 찾아내 즐기는 우리가 21세기 프로이드들 아닌가. 미노타우루스, 마침내 우리에게 유죄라 소리치지 않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