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함께

한반도 미술창고 뒤지기

변두리1 2019. 1. 28. 16:26

한반도 미술창고 뒤지기

발로 쓴 두 권의 책 -

 

   책을 쓴 한젬마의 이름도 사진도 친숙하지 않다. 하지만 그 노력은 가상하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본 만큼 안단다.”관심이 어느 하나로 고정되지 않은 것은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여정일 뿐 아니라 그 사람의 넓이의 표현이다. 소개된 이들이 야인(野人)들 같아도 실은 내인(內人)들이다. 긴 세월 속에 그렇게 살아남아 유적과 흔적들을 가지고 있으니 자신의 분야에서 승리한 이들이다. 다루어진 이들이 모두 처지와 형편이 다르다 할지 모르나 가정이 탄탄하든지 왕의 인정을 받았든지 스승을 잘 만나든지 몇 대째 내려온 화가의 집안들이다. 근현대 화가들은 외국에 유학을 다녀온다. 당시에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심지어는 주변의 인정을 받고 미술관이 세워지거나 작품이 보존되어진다.

  이 땅에 살다 간 사람들 중에 미술에 타고난 재주가 많던 이들이 어디 한둘 이었을까. 여인들과 종과 노비 중에도 무수한 이들이 있었을 게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예 그 문이 열리지도 않았다. 인류의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예술은 귀족들의 놀음이 되고 우리 선조들의 사회도 큰 차이는 없었다. 어쩌면 출발부터 어느 정도 종교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도 중국의 영향으로 시서화(詩書畵)가 문인 또는 귀족들의 영역으로 굳어진 여파일수도 있다. 그것은 음악(音樂)에 속하는 소리나 공연예술, 무예(武藝)에는 좀 더 다양한 층이 참여했음을 감안하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미술가들이 의식이 깨어있고 개성이 강하다는 걸 글을 통해서 볼 수 있었다. 내 무지한 편견으로 예술로 평생을 사는 이들은 편협함이 있을 줄 알았더니 그들이 한 시대를 앞서가고 세상을 앞에서 끌고 있는 이들이었다. 미술관과 박물관들이 곳곳에 소개되어 있는데 그것들에 무심하게 살고 있었다. 한곳 한곳이 얼마나 소중하고, 오늘의 모습으로 유지되는 게 힘겨운 가를 잘 몰랐다. 삶에 시달리며 살다보니 의식주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것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나 보다. 인간됨의 근본을 자주 돌아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정신면을 자극하는 곳들을 찾아보아야 한다. 인문학의 열풍이 유행처럼 불다가 소리 없이 꺼져간다. 경제에 밀리고 정치에 밀리지만 서서히 그 저변이 넓어져 가면 좋겠다.

  책을 덮고 나니 많은 것을 대하기는 한 것 같은데 마음과 기억 속에 남는 것은 많지 않다. 그렇다. 아는 만큼 감동을 받고 본 만큼 알게 되는데 그 근본 바탕이 얕은 게다. 가까운 곳에 있어 가보기도 하고 몇 번 지나치기도 했던 김기창의 운보의 집이 생각난다. 방안 책상에 앉아 글로만 본 것이 아니라 몸으로 가보았기 때문이리라. 언젠가 분명치 않으나 그곳에서 저 분이 운보라고 누가 알려줘서 멀리서 거구의 노인을 본 것도 같다. 그가 그렸다는 한복 입은 예수의 그림도 떠오른다. 너무도 강렬한 윤두서의 자화상이 잊히지 않는다. 너무도 강렬해 주눅이 들고 심한 질책을 당할 것만 같다. 초상화를 그리는 자세가 서양이 과장(誇張)과 미화(美化)라고 하면 중국과 조선에서는 전신사조(傳神寫照)요 일호불사편시타인(一毫不似便是他人)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엄정하고 힘든 일이었을지 알겠다. 심지어는 얼굴에 얽은 마마자국과 눈 한쪽이 찌그러진 것까지 사진처럼 그리고 터럭 하나까지 소홀히 하지 않으려 했다. 그들의 장인정신이 전해지는 것 같다.

  강원도에 있다는 박수근미술관의 웅장하면서도 단순한 모습이 오랫동안 남는다. 푸근한 산자락에 자리 잡고 앉은 듯한 박수근 조각상의 편안한 모습과 그 무릎에 앉은 해맑은 두 소녀의 모습이 정겹다. 화가들의 무덤에서 보는 파격적인 탑비가 고정관념을 내려치고 몇몇 조각상들이 후련하다. 오지호의 남향집의 환상적인 햇살과 색채가 기억 속에 따사롭다.

  국토의 최남단, 막내 같은 제주도에 추사와 이중섭이 묵직하게 내 마음에 자리를 잡는다. 늘 좋은 게 좋은 것은 아니다. 추사와 다산의 삶에 유배가 없었다면 그들의 생애가 그토록 풍성하고 다부질 수 있었을까. 현실에서 당하는 역경과 고통이 꼭 부정적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강요되는 환경에 창조적으로 적응하여 놀라운 것들을 후세에 남긴 그들의 굴하지 않는 정신세계를 본다. 대책이 서지 않는 무능력하게 다가오는 그림천재 이중섭, 현실에서 이런 이들을 만나면 어떨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지고 사랑받는 화가 중 한 사람이 이중섭일 게다. 그가 보여준 그림에 대한 성실한 자세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화가들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왜 그들이 사는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이들이 그렇게 많은가. 그들의 사후에 그림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심지어 투기의 대상이 되는 것은 또 무엇인가. 하기는 그러한 이들도 많은 화가들 중에 극히 소수이리라는 짐작을 한다. 전라도에 소개된 화가들 가운데 몇 대씩 내려오는 화가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그들은 행운아들인가 인생의 무거운 짐을 타고난 이들인가. 이제 정씨와 윤씨 그리고 허씨들은 한 번 더 마음을 추스르고 대해야겠다. 세월이 얼마나 더 흐르면 미술책이나 그림이 내 마음에 또렷이 들어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