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弟 判 歸 惑(제 판 귀 혹)
7장 弟 判 歸 惑(제 판 귀 혹)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 공생애 마지막 해의 초막절이 다가왔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의 하는 일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다. 함께 밥 먹고 잠자고 부모에게 혼나며 자라난 형제가 어느 날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이며 자신을 하나님이 보냈다고 하면 누군들 쉽게 믿을 수 있을까. 서른쯤 되어 어느 날 돌연 집을 나가 주변의 젊은이들을 수십 명 데리고 다니며 사람들을 향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듯하니 가족들의 걱정도 만만치 않았을 게다. 심심찮게 귀신이 들었다는 얘기도 들려 가족들이 찾아 나서기도 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래도 가끔씩 들르는 예수님께 한두 마디씩 했던 모양이다. 공적인 일을 하려면 많은 이들이 모이는 곳에 가서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좋으니 초막 절기에 예루살렘에 일찍 올라가라는 게다.
兄弟(형제)는 부모가 같은 자녀들이다. 예수님이 맏이니 兄이고 다른 동기들은 弟다. 兄은 모든 동기들을 대표하고 대변한다. 타인들을 향해 발언권이 있고 형제들에게 명령권이 있다. 그러니 큰 입을 가질 수밖에[⼝]…, 여기저기 대표하며 다니고[⼉], 그게 兄이다.
동생들은 弟(아우 제)다. 활 궁(弓)은 잘 보이는데 다른 것은 모르겠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가닥 아(丫)가 들어있다. 한 부모에게서 났으니 그럴 수 있겠다. 丫에 弓이 더해지고 ⼃(삐침 별)까지 있다. 丿은 비스듬히 자르거나 내려 긋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날카롭게 잘린다. 약하게 표현하면 비치다가 되는데 스며들거나 속에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말과 글이 文(문)이라면 武(무)를 대표하는 것은 弓과 刀일 게다. 동생들은 弓을 차지한 게다. 예수님의 弟들도 兄의 승천 후에 예루살렘 회의를 주재하기도 하고 야고보서와 유다서를 남기기도 한다. 초대교회의 지도자로서 나름 자기들의 역할을 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예수님처럼 많은 오해를 받은 이도 없을 게다. 결국은 오해로 사형판결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보다 더 왜곡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다. 유대인들은 그는 배운 것도 별로 없는데 어떻게 가르치느냐 말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교훈이라 답한다. 모세를 비방한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비난과 오해에 대해 바르게 판단하라고 일갈하신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떠도는 소문과 부정확한 근거로 오해하고 오판한다는 게다. 가룟 유다도 잘못된 기준으로 잘못 판단한 것이다.
判斷(판단)의 斷은‘끊다, 나누다’는 뜻으로 繼에서 糸가 없는‘이을 계’와 斤(도끼 근)으로 되었다. 判(판단할 판)은 半(반)에 ⺉(선칼 도)를 더한 것으로 半은 牛(소 우)를 둘로 나눈 것이란다. ⺉는 刀(칼 도)가 우변으로 쓰일 때 나타나는 형태다. 칼로 소를 두 동강이 내듯이(결코 쉽지 않을 듯) 무언가를 확실하고 분명하게 나누는 것을 말한다. 재판이 이렇게 나누는 것인데 판결문을 양편에서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현명한 솔로몬 왕은 아기의 친모를 가리는 재판에서 아이를 칼로 둘로 나누라고 한다. 母性愛(모성애)라는 인간 본성을 이용한 정확한 판단이었다.
예수님 당시 판단을 요구받은 이들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을 게다.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사람들은 온데로 돌아간다. 날이 저물면 아침에 나온 집으로 돌아가고 죽으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 묻힌다. 타국에서 죽어도 웬만하면 고국으로 돌아와 고향으로 내려가 산에 묻힌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 하늘에서 왔으면 하늘로 돌아가고 땅에서 왔으면 땅으로 돌아간다. 예수님도 사역을 펼치시다가 갈릴리로 돌아가시고 죽으셨다 부활해 갈릴리로 가시더니 결국 떠나오신 하늘로 돌아가셨다. 어디로 돌아가는가는 어디에서 왔는가와 연결되어 있다. 온데로 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위로부터 나고 오셔서, 다시 아버지께로 승천해 돌아가셨고, 땅에서 난 이들은 땅으로 돌아간다.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성령이 계시면 하늘 사람이 되어 출생지가 바뀐다. 본래 하나님의 작품이요 하늘 사람인 우리들이 마귀의 꾐에 빠져 땅의 존재가 되었지만 예수께로 가면 회복이 된다.
본향으로 돌아감이 歸鄕(귀향)인데, 歸(귀)는‘돌아가다, 마치다, 죽다’의 뜻으로 ?(퇴), 止(지), 帚(추)로 이루어졌다. ?는 작은 언덕의 의미이고, 止는 풀들이 나는 낮은 땅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못하니 ‘이르다, 그치다, 끝나다’의 뜻이 되었고, 帚는 다시 又의 변형인 彐과 冖(덮을 멱) 巾(수건 건)으로 되어 있다. 곧 작은 언덕에 이르러 끝이 나는데, 손을 잡고 수건이 덮여 있는 것으로, 죽음에 이어지는 장례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하고 예수님의 골고다 십자가 사건이 떠오르기도 한다. 둘 다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는 모습이다. 모두가 가야 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 영원한 고향을 되찾지 못하면 땅으로 갈 수밖에 없다. 진짜 고향, 영원한 첫 고향인 하늘로 돌아가자.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성전 경비원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자 그들을 보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왜 그냥 왔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이때까지 그 사람처럼 말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 때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이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게 있었다. 기준이 그들이 아니라는 거다. 바리새인, 당국자 그들은 보수 기득권층이다. 어느 사회서나 그들은 새 것을 받아들이는데 늦다. 변화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감과 저항감이 있다. 변화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들어있고 그들은 복지부동이 습관이고 안정을 원한다. 사회가 변혁되면 그들은 잃을 게 많고 하류층들은 손해 볼 게 상대적으로 적다. 상류층인 그들은 현상유지를 염두에 두고 말한다. 율법을 모르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독설이다.
迷惑(미혹)은 정신이 헷갈리어 갈팡질팡하거나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거란다. 迷는 ‘미혹되다, 헤매다’는 뜻으로 米(쌀 미)에 辶(천천히 갈 착)이 더해졌다. 米은 자잘하고 알기 힘들다는 뜻이다. 惑은 或에 心이 더해졌다. 或은 나라 국(國)에서 큰 입구(⼞)가 없어졌다. 창 과(戈)를 보면 전쟁 중에 나라의 경계가 불안해진 상태이니 或, 혹시 하는 의심과 미혹의 마음이 밀려와 분명한 행동을 하지 못하는 상태일 게다.
심리적 변화는 惑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밑바닥에는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게 온전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겸허함이 있어야 한다. 신학도 시대에 따라 흐름이 달라지고 성경해석도 달라진다. 하나님과 말씀은 완벽하고 영원하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은 유한하다. 어느 새 21세기의 전반부가 깊어간다. 나이 든 성도들은 이때를 살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많은 저명한 설교자들이 시련의 시기를 하나님께서 감하여 이천년 이전에 주님이 다시 오리라고 설교했다. 이제는 누구도 그런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 시기가 지나가 버려서 누구나 옳지 않다는 걸 안다. 惑이 건강한 관심이 되었으면 좋겠다.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하는 완벽함일 수도 있다. 미혹을 지나 확고함으로 나아가면 흔들림이 없다. 그 좋은 성경적 본보기가 도마일 게다.
아우들이 판단을 하니 그들에게 돌아옴이 의혹이었다[弟 判 歸 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