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문화

바오로 로드를 가다

변두리1 2019. 1. 18. 18:02

바오로 로드를 가다

 

  바울의 선교여행 길을 따라 한 수사가 순례하며 여러 사색을 적은 글이다. 서기 1세기에 겪은 일들을 21세기의 환경에서 본다. 이천여 년의 간격이 클 텐데도 감격은 쇠해지지 않는가 보다. 카톨릭도 미사 참여율이 점차 낮아져 간다고 한다. 신앙이 약해져 가는 것인가. 영적으로 무감각한 시대로 가는 건 아닐까. 수사들도 수도하는 동안 고민이 적지 않단다.

  선교에 있어 문화에 대한 체험이 공감을 일으킨다. 브라질에서는 선교를 위해 춤을 배워야 한다고 한다. 축제 때에는 늘 춤을 추니 그것은 곧 생활이고 문화란다. 브라질에서 생활할 때 기회가 되어 수녀님이 춤을 추자고 하는 걸 문화를 몰라 이해하지 못하고 거절을 해 동료 선배들을 곤란하게 했다고 한다. 또 어린 수사가 계속 플라스틱 병으로 머리를 쳐 참다못해 발길질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어린 사람의 그런 행동은 연장자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란다.

  수도사들이 하는 삼대 서원이 잊히지 않는다. ‘청빈, 독신, 순명이다. 평생을 가난하게 홀로 살고 주님의 명령에 절대 따르겠다는 게다. 나야 그들과 차지가 다르지만, 독신은 물 건너 간지 오래니 청빈과 순명이라도 죽는 날까지 지키고 싶은데 이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듯하다. 그들이야 개인 재산이 없어도 교단에서 생애를 책임져 주지만 내가 속한 교단은 노후의 보장이 약하다. 청빈을 모르지 않고 개인 재산이 별만 있는 것도 아니지만 늘 불안이 있다. 불안이 안전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경제문제를 떠나기 어려운 현실적 여건이다. 청빈을 자랑으로 알고 평생을 살아가면 성공과 실패에도 초연할 수 있을 듯싶다. 경제적인 면을 떠나면 나 같은 소인이야 성공과 실패에 뭐 그리 애달파 할 게 없을 게다. 그냥 정해진 길을 그런 것과 무관하게 한걸음씩 걷는 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순명, 무섭다. 내 생각을 앞세우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의 기대가 상충할 때, 내게 맞춰달라고 간청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성공의 비결이라는 바오로 선교회의 기도문을 본다. 그래도 뭔가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느낌이다. 나름의 고민과 절실함이 왜 없었겠는가. 그들이 맡은 일이 매스컴 선교라니 이해가 된다. ‘당신의 무한히 선하심으로 저희의 특별한 성소의 필요에 따라 저희의 영적 작업, 공부, 사도직, 청빈의 결실을 배가시켜 주소서밖에서 볼 때, 무풍지대 같아도 쉽지 않기는 큰 차이가 없을 게다.

  이천여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초대교회의 터와 돌기둥들과 잔해가 남아있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바울 역시 다 되어 있는 곳들을 영접 받으며 순례하고 선교한 것이 아니니 힘겨웠을 여정과 하루하루가 짐작이 간다. 가는 곳 마다 위험이 따르고 반대자들의 오해와 박해가 그치지 않았다. 매도 많이 맞고 옥에도 갇히고 질병도 있었으니 언젠들 편안할 때가 있었을까. 꿈인들 가끔씩 좋은 이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고 성도가 되고 살뜰한 보살핌을 받았을 때 더할 수 없이 고마웠을 게다. 빌립보교회와 고린도교회를 대하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까를 생각한다.

  초대 일곱 교회 가운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큰 책망을 받았다. 그들은 무슨 큰 잘못이나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육체적으로 안락한 삶을 살았다. 그들이 살던 지역 자체가 무역과 의류와 의료산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그들은 박해와 시련에서 빗겨나 있었지만 주님은 그들을 향해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런가하면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는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하신다. 빌라델피아 교회를 향해서도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칭찬하셨다. 어쩌면 물질적 풍요가 영적인 빈곤함, 심하게는 영적인 타락에까지 이를 수 있고 반대로 물질적 궁핍이 영적인 부요함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물질적 부요와 육체적 안락함으로 자신도 모르게 주님으로부터 커다란 책망을 받을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닌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사데 교회를 향해서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말씀하신다. 겉으로는 활기찬 것 같고 많은 계획들이 실천으로 옮겨지고 대단한 듯하지만 속은 텅 비고 영은 죽어있을 수 있다는 무서운 말씀이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다. 순간순간 긴장하지 않으면 껍질만 남을지 모르고 껍질마저 잃을지 모른다.

  루디아를 찾아보잔다. 두아디라 출신 자주 옷감 장수 루디아, 요즘 말로 하면 의류회사 사장쯤 되지 않을까 싶다. 바울에게 복음을 전해 듣고 유럽의 첫 성도가 되고 바울을 환대하고 빌립보 교회의 창립 성도가 된다. 그 후로 바울의 선교에 있어 항상 힘이 되었던 하늘나라의 일꾼이었다. 물질적으로 돕는 이들뿐 아니라 마음을 같이하는 이들, 기도로 돕는 이들이 삶의 루디아다. 그들을 생각하면 늘 새 힘을 얻을 수 있고 쳐진 어깨가 다시 올라간다. 바울 사도는 참수를 당하는 순교의 삶을 살았다. 이제는 순교하기가 쉽지 않다. 달리 말하면 외적으로는 성도들이 박해를 받을 일이 적어졌다. 하지만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죽기까지 충성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