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해가는 노엽(老葉)들
소멸해가는 노엽(老葉)들
내 방에서 길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잎들을 모두 떨군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봄부터 늦가을에 이르는 예닐곱 달 동안 제 멋대로 자라난 가지들이 울을 이뤘다. 울안에 빠진 잎들이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단한 잔해와 함께 갇혀 있다. 금빛이던 잎들이 갈색이 되어도 몇 차례 바람이 불어도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낡아만 간다.
아침햇살에 미풍이 이니 갇혀있는 바랜 잎들이 반짝인다. 눈 녹은 물기가 빛을 되비추나 보다. 가느다란 줄기사이로 점차 낮아져가는 잎들의 높이가 드러난다. 눈이 내려 쌓이더니 그 후로 또 낮아졌다. 엉성한 까치집을 떠올리게 하는 저 모습은 언제쯤 내 의식에서 사라질 수 있으려나.
수 일전 방송으로 스쳐들은 한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아흔두 살, 열일곱에 중국으로 건너가 해방 때까지 고초를 겪으셨단다. 해방이 되고도 돌아오지 못하다가 2011년 국적을 회복하고 그 다음해에야 돌아오셨다고 한다. 이제 스물다섯 분만이 생존해 계신다고 한다. 위안부문제가 표면화되고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는 수요 집회가 십 수 년 이어졌지만 일본의 반응은 차갑기만 한데 고초를 겪은 분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신다.
그분들의 맺힌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릴 수는 없었나. 최소한의 양심도 기대할 수 없는 일본을 향해 언제까지 대답 없는 외침을 계속해야 하나. 국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책임이 국가에 있다. 현 정부가 사죄하고 그분들의 노년과 복지를 챙겨드리고 그 고초를 기억하기 위한 일들을 해나가는 게 합당하지 않을까 싶다. 밉기도 하고 얼굴을 마주하기도 싫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이웃국가와의 관계고 국제사회의 일이다. 일본이나 우리가 영토를 옮기지 않는 한, 인근국가라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일본이 고와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익을 위해 그들과의 협력과 교류가 필요하다. 마음이 더 너그러운 편이 용서해야지 다른 수가 없을 듯하다.
같은 처지의 할머니들 가운데 몇몇 분들이 광주시 퇴촌면의 ‘나눔의 집’에서 살고 계신다고 한다. 왜 잔가지 울 속에서 삭아져 가는 은행나무 잎들을 보면서 그분들이 떠올랐을까. 그분들은 우리 사회가 기억해주기를 원할까, 아니면 잊어주기를 바랄까. 지나간 아픈 상처를 언제까지고 파헤치고 들춰내기보다 이제 남은 날들이라도 조용하게 사시도록 하는 게 남은 이들이 할 일은 아닐까.
자주 대하는 이들과 희로애락이 쌓일 수밖에 없다. 국제사회를 보아도 이웃나라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긴 역사를 이어오면서 숱한 은원(恩怨)이 중첩되기 때문일 게다. 개인의 일생을 보아도 가족구성원들이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받고, 학창시절에도 가장 친한 친구와 티격태격하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국가적 견지에서 우리는 북한과 일본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왔다. 우리가 상대하는 그들은, 북한이 떼쟁이 같고 일본은 조직 폭력배집단을 닮았다. 자연계에 먹이사슬이 있고 순환이 있듯이 개인이나 국가도 일방적인 관계는 건강한 게 아니다.
자연은 순환한다. 한 곳에 멈춰있으면 일이 생기고 건강하지 못한 상태가 된다. 우리를 둘러싼 정세가 흐르지 않고 있어 문제가 생기고 있다. 우리 지역이 아프니 세계의 시선이 모인다. 이해 당사자들이 풀기 어려우니 주변이 나서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일이 아니어서 한계가 있다. 흐름이 막힌 곳을 뚫어 선순환(善循環)을 일으키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때론 꽉 막힌 가해자보다 상처가 아물어가는 피해자의 용서와 아량이 빛나는 순간이 있다. 오늘의 삶을 위해 손해 볼 줄 아는 아량을 보이고 이제는 그들이 못된 짓을 할 수 없도록 확실히 저지할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져야 한다.
선순환을 위해 막힌 곳을 뚫기 위한 강한 압력과 용해제가 있어야 한다. 대일본 문제와 북한에 대해 온 국민의 공개적이고 적극적인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답답한 그들에게 의존하느니 차라리 우리가 주도적으로 뚫고 털어버리고 상생의 앞날을 열 수 있기를 바란다.
고개 돌리면 눈에 띄는 엉성한 까치집 같은 울 속에 갇힌 은행잎들은 잊힐 자유조차 없는가보다. 가끔 찾아와 짹짹거리는 참새들은 조금도 불편하거나 답답하거나 불편해하기는커녕 말라가는 은행잎들을 푹신한 이불 정도로 느끼는 지도 모른다.
많은 것들을 낡아가게 하는 햇살이 자연스런 해결책일까. 그 힘으로 삭막했던 나무에 싹이 트고 꽃이 피고 푸름이 오고 마침내 단풍이 들고 갈색으로 변해 떨어져 가지사이에 쌓였으니 이제는 그들을 잘게 부수어 우주의 거름으로 삼을 수 있는 힘을 그들이 가지고 있을 것도 같다.
겨울부터 준비해 한 해를 산 그들의 수고와 지나간 날들의 비바람과 먹구름을 추억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그들을 지켜볼 의무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들의 날이 길어야 내년 삼사월, 새 잎들이 나오는 시기를 넘을 수 없을 게다. 겨울 햇살과 바람에 나날이 그들은 부피가 줄고 높이는 낮아져 간다.
자연이 이루는 일들을 경건하게 바라보며 그에 견주어 세상일을 헤아리는 한 사람, 성찰자로서의 역할과 여유가 내게 필요한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