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함께

풍경과 상처

변두리1 2018. 8. 2. 05:40

풍경과 상처

김훈 기행산문집 -

 

  이 나라에서 책을 몇 권이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김훈을 모를 리 없다.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글쟁이다. 그의 기행산문집이라니 내용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아니었다. 모두가 기행산문이요 감동적인 글이라 해도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이것은 독자를 기만하는 것이요 유치한 자기오만이 가시지 않은 글이라 생각한다.

  글을 이렇게 읽기 어렵게 써도 되는가 싶다. 평론도 읽은 게 별로 없지만 그들의 글은 한없이 어렵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들은 어려운 말에 쾌감을 느끼는 듯하다. 그래야 뭔가 유식한 것 같고 권위를 인정받는 느낌을 갖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들을 글은 좋아하지도 않고 읽고 싶지도 않다. 이 책은 시를 중심으로 소설을 포함하고 여타부분을 곁들인 예술평론이라 하는 게 낫다. 시종여일하게 보여주는 결이 그러하다. 마치 나는 이런 소재를 가지고도 이 정도의 글을 쓸 수 있다는 걸 과시하는 것 같다. 작가가 자신이 누구라는 걸 각인시키려는 의도처럼 느껴진다. 이 글에 기행산문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 서울의 궁들과 종묘를 사진과 함께 설명하고는 통일신라의 불교와 유적을 자랑하는 경주의 모습들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작가가 기행산문이라 극구 고집한다면 아니라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지만 객관적으로 수긍할 수는 없다.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습관적으로 지상에서 1km 쯤 올라간 상공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지형을 묘사한다. 신선하기도 하고 시야를 확 넓혀주는 것 같기도 하고 사고의 폭이 대단해 보인다. 지역에 대한 묘사는 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고 싶은 얘기는 문학이고 예술이고 사람이다. 저자는 독자들을 감탄하게 하고 평자들로부터 상당한 지적 수준을 소유한 작가로 인정받기를 원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소기의 성과를 이뤘다고 하겠다. 독자들이 작가가 상당하다는 인상을 받고 정작 무엇을 말하는지 알맹이로 감명을 받지 못한다면 큰 피해를 본 게다. 시간과 열정과 돈을 들여서 별로 얻은 것이 없는 결과를 맞은 게다. 작가로서 크게 미안해야 할 일이다. 나로서는 벽을 느꼈으니 그렇지 않아도 주눅 들어 있는데 더 위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는 교수(크게 존경치 않아 존칭 붙이기가 그렇다) 중에 열등감이 많은 이가 하나 있었다. 그가 해외유학을 다녀왔는데 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수업시간에 악취미가 발동하면 알아듣기 어려운 강의로 다수를 잠재우고는 혼자 히죽히죽 웃고는 했다. 개인적으로 그런 이들은 남 앞에 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건 교육이 아니라 가학이요 자기만족일 뿐이다. 결국은 자신은 외톨이가 되고 남들이 자기를 몰라준다고 불평만 하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낮에 차를 타고 오면서 노래 한 곡을 들었다. 나이가 드는 것은 늙어가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거라는 가사가 마음에 남았다. 나이가 들고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사회를 살만하게 하는 것 같다.

저자가 책에서 동어반복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정말 자신이 동어반복을 많이 사용하는 건 아닐까. 여기저기서 등장하는 빗살무늬토기는 무엇인가. 뭔가 상징성을 갖는 듯한데 잘 모르겠다. 저자가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이라는 소설로 등단했다고 하던데 그 작품을 쓰기 전이라면 그것이 마음속에 차있던 것은 아닌지 싶다.

  여러 번 동원된 폭이 넓은 성적인 비유가 인상적이다. 남태평양 절해고도에서 보았다는 토인여자에 관한 것이나 파주, 문산의 임진강의 갈라짐을 아이를 분만하는 여인의 가랑이처럼 묘사한 것, 꽃에 대한 생물학적인 사실적 설명, 아궁이와 집의 구조를 여성성으로 해설하는 것 등이 김훈답다.

시간과 생멸, 그림자와 빛 같은 설명이 거듭되는 것도 의도적이라기보다 그것들이 마음에 있고, 상황이 그들을 이끌어 낸 것이 아닌가 싶다.

  저자가 말한 대로 물과 햇빛이 있으면 식물이 자란다. 집 울안에 작은 뜰이 있어 호박을 심었다. 담 때문에 햇볕을 잘 받지 못해 옥상으로 커나가도록 철사 줄을 매 주었다. 굴촉성이라고 덩굴손에 닿는 것을 감고 올라가는 성질을 갖고 있어 멀리서 보면 철사는 보이지 않고 호박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하다. 넓은 공중으로 올라가니 막아서는 것이 없어 햇볕을 충분히 받아서인지 호박이 여럿 달리고 있다. 출발지의 부실한 영양과 줄기와는 다르게 싱싱한 줄기들이 벋어나고 있다. 말 그대로 물과 햇빛이 잘 갖춰지면 풍요롭고 자라는 것 같다.

  우리 삶에 물과 햇빛에 해당하는 것이 무얼까. 의미 있는 목표와 적당한 동기부여가 아닐까 싶다. 좋은 글을 통해 가끔 격려 받고 때로 전진을 위한 강한 자극을 받는 게 그런 것 일 듯하다. 김훈 작가의 풍경과 상처가 아직도 갈 길이 한 없이 멀고 알아야 할 게 저 앞에 있다는 적절한 자극이 아닐까 여겨진다. 같은 자극을 받아도 적용할 수 있는 자신의 일들은 한 없이 많다. 수밴 년 동안 무수한 이들이 연구하고 걸어간 길이 멀어 도달하고픈 목적지는 아물거리는 저 너머에 있다. 그들이 간 곳에 내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처품은 풍경하나 더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