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소리들
삶의 소리들
십여 년을 넘게 시장통에서 살았다. 크지 않은 시장에, 손님들이 많아 늘 북적이고 이런저런 소음이 항상 들려왔다. 여러 가게로부터의 소리도 만만치 않은데 언제부턴가 번영회에서 스피커를 켜놓기 시작했다. 주로 1980 ~ 90년대의 그리운 노래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한두 번 듣기는 괜찮지만 끊임없이 들려오니 소음이었다. 걸어 오 분 거리도 안 되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어찌된 일인지 너무 조용하다. 주민들이 사는 건지 의심스러울 만큼 적막했다. 가끔 폭주하듯 하는 오토바이 소리가 거슬리고, 수리한 집 건물에서 부정기적으로 딱딱 소리가 울려올 뿐이었다.
두세 해 전이던가. 근처에서 나이든 여인의 울음소리가 한동안 들려왔었다. 사람 사는 게 항상 즐겁고 좋을 수만은 없는 게니 그러려니 했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울음소리는 사라졌다. 이사를 간 듯했다. 가끔 고양이들 싸우는 소리가 들리고, 어린 아기 우는 듯한 그들의 소리에 신경이 쓰였다. 다른 동물들은 도시화를 겪으며 감소한 것 같은데 고양이는 더 늘어났나 보다. 담을 타고 어슬렁거리다 사람과 눈이 마주쳐도 잘 도망가지 않는다.
이 적막한 삶이 한 달여 전쯤부터 바뀌고 있다. 주변 한 집이 며칠 동안 부산스럽더니, 살던 이들이 이사 가고 새로운 이웃이 들어온 모양이다. 평소에 듣지 못한 고성이 들려올 때도 있고, 두세 살 정도 아이의 그악스런 울음소리가 담을 넘어오기도 한다. 사람이 사는 동네가 된 것 같다. 활기가 넘쳤던 내 어렸던 시절 동네의 느낌이다. 담도 대단치 않았고 방음은 서로신경 쓰지 않아 이웃의 생활하는 소리들이 자주 들려왔었다. 우는 소리가 제일 많았다. 갓난아이나 청소년들이 주를 이루었고 가끔은 어른들의 울음도 섞여 있었다.
삶의 정겨운 소리들은 점차 사라져갔다. 이웃들은 도시로 떠나고 마당 있던 집들이 점차 사라지고 아파트가 대세가 되었다. 집의 구조부터 폐쇄적으로 되어갔다. 남의 집을 자주 드나들거나 넘겨다 볼 수 없었다. 현관을 지나고 문을 잠그면 외부와 차단되고, 자기 방에 들어가면 가족들과도 분리가 되었다.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이들과는 단절되고,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통해 멀리 있는 보이지 않는 이들과의 문이 열린다. 겨울에는 난방을 위해, 여름에는 냉방을 위해 창문은 꼭꼭 닫고, 답답한 공기는 기계를 통해 청정하게 하고 물은 정수해 마시고 산다.
새로 이사 온 집은 방음이 익숙하지 않은가 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쉽게 담을 넘고 어른들의 고성도 걸러지지 않고 건너온다. 며칠 전이었다.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귀에 익은 복음성가가 들려오고 있었다. 몇 번 반복되는 걸 보니, 유튜브를 통해 거듭 듣고 있는 듯했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발음이 어딘가 조금은 어색하다. 새 삶을 살려 이 땅에 정착한 조선족 동포인가 보다. 같은 믿음을 가졌다는 생각에 갑자기 친밀감이 느껴진다. 정작 목회자 가정인 우리 집은 복음성가가 울리는 일이 거의 없는데, 이웃에게서 커다란 찬양소리를 들으니 이상하다.
이사하면서 옆집이 교회요, 목회자 가정이라는 걸 들었을 게다. 어쩌면 삶의 소음이 조금 있다고 해도 잘 지내보자는 뜻 같기도 하고, 공통점이 있으니 경계를 풀자는 것도 같았다. 내 편에서도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교회활동으로 소란스러울 수 있는데,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이해해 줄 것도 같고 거부감이 적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서로 담을 맞대고 있지만 가까운 곳은 서너 발짝도 되지 않는다. 집안에 더 먼 곳이 많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그 가정 사람들을 한 번도 얼굴로 대하지 못했다. 귀로만 들었다. 그들은 소리로도 우리를 듣지 못했으리라. 누가 이웃인지 몇 달이 지나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갑자기 이웃의 두세 살 아기 울음소리가 담을 넘어온다. 며칠 전 병원에 다녀왔다며 태아가 딸이라고 알려준 딸의 목소리가 귓전에 살아난다. 나도 얼마안가 아기울음소리를 무어라고 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될지도 모른다. 어느 날 외손녀가 날 찾아오고, 어느 게 맘에 들지 않거나 불편해 그악스레 울어댄다면, 그 소리가 온 동네에 퍼질 게 아닌가. 아이를 적게 낳아 인구의 불균형이 심해지고 나라가 늙어간다고 많은 이들이 걱정한다. 아기 울음소리를 듣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이웃에 사는 그들이 애국자라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조금은 생활소음이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사람이 사는 동네 같기도 하고 이웃이 있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정 귀에 거슬리는 이들은 알아서 창문을 닫아 대처를 하리라. 듣기 싫어도 참고 살아야 하는 오토바이 소음도 있고 신경을 긁어대는 고양이 소리도 견디고 사는데 그에 비하면 사람 살면서 나는 소음은 정겹게 들어 줄만도 하다.
아기들이 내는 소음은 인류의 역사를 이어가는 소리요, 감정에 충실한 소리 같아 그렇게 귀에 거슬리는 것 같지 않다. 삶의 소리는 적막에서 오는 내 긴장을 풀어주는 좋은 역할을 한다. 또 다시 아기 울음소리가 담을 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