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함께

남자의 물건

변두리1 2018. 6. 5. 17:16

남자의 물건

존재확인의 문화심리학 -

 

   저자가 심리학을 공부했나보다. 제목 자체가 오해의 여지가 있다. 지은이는 그 오해를 막지 않는다. 하긴 그게 저자의 권한 밖에 있는 것이긴 하다. 전반부에 그가 남자들에게 건넨 글 중에 시키는 일만 하면 개도 미친다는 내용에 크게 공감이 간다. 구별하기 어려운 고통은 실험적 신경증이고 학습된 무기력은 모든 의욕을 앗아간다. 모든 생물들에게 선택할 자유와 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내가 많이 아쉬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설렘과 그리움이 있어야 살만한 인생이고 기쁨을 안다고 말한다. 내 현실을 돌아볼 때, 그러한 것들이 적지 않음을 감사한다. 책과 글이 그들이지 싶다. 그가 말하는 성공에 대한 것도 크게 공감이 된다. 꼭 그렇게 고생을 거치고 참고 견뎌야만 성공에 이르느냐는 거다. ‘나는 이게 성공인지 모른다. 내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 힘든 줄도, 이렇게 오래 한 줄도 몰랐고 고생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너무 행복하다.’이런 건 어떻겠냐는 거 아니겠나 싶다. 내가 성공을 한다면(이제 와서 해보고 싶다) 그렇게 행복한 성공을 해보고 싶고 될 것 같기도 하다. 나도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건가.

  글의 본론이라 할 수 있는 2부 남자의 물건도 적잖이 재미있다. 들어가는 맛보기처럼 김갑수의 커피 그라인더와 윤광준의 모자 그리고 글쓴이의 만년필을 이야기한다. 단점이 강점이 된 것도 같고, 허전함에 대한 보상심리 같기도 하다.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현실에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고 자신의 정체성이요, 상징이 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나 좋으랴.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이어령 선생의 책상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이 나라의 지성을 대표하는 물건이 책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무려 삼 미터에 이른다는 책상에 컴퓨터가 여섯 대가 있다고 한다. 책상을 향하여 네 대, 뒤돌아서면 또 두 대가 있고, 그 모두를 사용하고 있단다. 선생에게 책상은 자신의 일터요 영역이요 싸움터요 놀이터인 셈이다. 그 책상에서 많이 하는 행동이 책상위에 발을 올리고 공상을 하는 거란다. 그야말로 상상을 통해 현실을 풍요롭게 하는 그분다운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신영복 선생은 벼루를 자신을 나타내는 물건이라 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잘 알려진 선생은 더불어 숲, 처음처럼, 나무야 나무야, 강의, 담론 같은 생각의 깊이를 더하는 책들을 내셨다. 무기수의 삶을 산 그분은 감옥에서 붓글씨를 본격적으로 제대로 배우신 모양이다. 내용과 어울리는 모습을 지닌 서체를 개발하고 그 글씨 사용료를 학교에 기중하기도 하셨다. “서울이라고 쓴 글씨는 북한산과 한강을 형상화해서 널리 알려지고 서울 시장 집무실에 걸려있다고 한다.

  한국축구의 산 증인이랄 수 있는 차범근은 계란받침대를 들었다고 한다. 그분의 이름 뒤에는 아무 것도 붙이지 않으면 너무 허전하다. 그냥 자연스레 붙는 명칭이 선수와 감독이다. 다른 직함도 많이 있을 텐데 언제나 선수 같고 감독 같다. 독일에서 선수 생활할 때 자주 사용하던 물건이란다. 가족들이 아침을 먹을 때마다 사용하던 도구로 지금도 그 때가 그립다고 한다. 독일에서 경기 중 심한 공격을 받아 부상을 당하고 남들이 다하는 상대에 대한 고발을 하지 않아 신선한 충격을 독일사회에 주었다고 한다. 삶의 위기 순간에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을 협상으로 이겨냈다는 부인도 대단하다.

  정치인 문재인은 바둑판을 자기의 물건으로 들었다고 한다. 정치인으로는 그와 함께 김문수를 인터뷰했는데 그는 언제 어디서나 적는 그의 수첩을 들었다고 한다. 김문수는 그래도 치열한 삶을 고민하며 산 듯한데, 문재인에 대해서는 별반 공감도 되지 않고 글쓴이가 말하는 진실하다는 느낌도 받지 못한다. 내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오히려 어리숙하다고 할까, 진실하지 못하다는 느낌이다.

  배우 안성기의 스케치북에 정감이 간다. 그는 연기에 큰 압박을 받을 것 같지 않다(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자신의 배역에 몰입한다기보다 객관적 거리감을 유지하는가 보다. 그의 스케치북을 분석하면 그가 겸손하지 않고 오만하다, 자존감이 높다는 진단은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렇지만 안성기만큼 전 국민에게 친숙하고 거리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이가 누가 있는가.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배우라고 생각한다.

  직업을 무어라 특정할 수 없는 인물, 조영남은 안경을 자신의 물건이라 했다. 코가 낮아서 쓴다고 분석하는 크고 네모난 안경을 수백 개는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왜 같은 안경이 그렇게 많이 필요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긴 조영남이라는 인물 자체가 알 수 없는 존재다. 글쓴이는 어머니로부터 여러 가지를 잘하면 조영남같이 된다는 주의를 늘 받으면 살아왔다고 한다. 문제는 이것저것을 전문가 수준으로 잘 한다는 데 있다. 보통 혹은 그 이하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여간 심통이 나는 게 아니다. 음악이나 미술이나 문학과 한일관계까지도 상당한 수준이 있는 듯하고, 국민적 인기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으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 비결을 지은이는 비현실적 낙관주의라고 한다. 죽을 때까지 누구보다 행복할 거라는 그 확신이 부러울 뿐이다. 그가 삶으로 보여주는 경계와 거리낌이 없는 말과 행동도 부러움을 자아내게 한다. 다른 삼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니 내 나름 할 말이 전혀 없다.

  자신의 물건을 하나쯤 갖는다면 얼마나 멋있고 자신감이 있을까. 애석하게도 아직 나는 그런 게 없다. 이제부터라도 찾아보아야겠다. 없다고 한들 그렇게 아쉬울 건 없다. 내게는 또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이 있는 것이니까. 필요한 만큼 소유하고 때가 차면 놓아주는 것도 삶의 멋있는 방식일 수 있지 않으려나.

  한 가지 물건을 통해서 한 사람의 삶을 조감해 본다는 흥미로운 방법을 알게 된 것은 유용한 도구를 얻은 듯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