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활

남천 다시 살다

변두리1 2018. 5. 19. 19:41

남천 다시 살다

 

  지난해 초, 어느 방송에선가 집을 몇 군데 지어주는 걸 보았다. 그 중 한 집에 조경을 하며 남천나무를 심었다. 그 나무가 어디에 좋다고 하던데, 잊었다. 공사(空士) 앞에 나무시장이 생겨, 남천나무를 사왔다. 나무에 문외한인 내가 자랑스레 주문할 수 있는 게 남천이었다. 자연스런 어투로 남천 있느냐고 물었더니 있단다. 두 그루를 사다 뒤뜰에 심었더니, 한 그루는 탈 없이 잘 자라는데 다른 하나는 언제부턴가 성장을 멈추었다.

  늦봄과 여름과 가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아내는 수시로 물을 주었다. 나무를 길러본 적 없고 생태를 모르니 어쩌랴. 한 그루가 잘 살아서 잎을 내고 푸름을 유지하니 그냥 두어도 될 것 같았다. 나무가 살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다. 가정집 뒤뜰에, 그것도 보도블록 한 장 들어내고 그곳에 심었으니 땅이 옥토도 아니고, 햇빛과 바람이 충분치도 못하리라. 그래도 애틋함과 미련이 남아 부실한 남천을 뽑아내지 못하고 살아있는 양, 아내는 하루같이 그 나무에 물을 주었다.

  남천, 왠지 삼사십 대 건장한 아저씨가 떠오른다. 특별할 것 없이, 시골에도 살고 상경해 도시에도 살아갈 듯한 생활력 강한 수더분한 아저씨. 어디에나 잘 적응하고 뿌리내려 이웃집에 사는 이처럼 친숙하다. 어느 성에 붙여도 어색하지 않은 이 땅의 덤덤한 사나이, 남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아닌 게 아니라 여러 성을 가진 많은 남천씨들이 주르르 나타난다.

  폭이 좁고 길쭉한 마름모 모양의 잎에 손가락 굵기의 몸통을 했던 뒤뜰의 남천은 잎들이 누렇게 되더니 모조리 떨어지고, 가는 줄기는 황갈색이 되고 몸통은 고동색으로 딱딱해져 갔다. 그러는 사이에 가을이 기울고 겨울이 찾아왔다. 추위 속,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는 남천나무는 쓸쓸함을 더해갔다. 눈을 맞고 서있는 살아있는 나무도 안됐고, 색조차 달라진 남천은 여러 번 뽑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했다. 나무인 듯, 풀인 듯, 추위 속에 눈 덮인 모습은 가련함마저 묻어났다.

  겨울은 길었고 좀처럼 봄은 오지 않았다. 추위 속에도 햇볕이 따사로운 날에는 푸르고 붉은 잎들을 흔들며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지난겨울 혹독한 추위가 몰려와 많은 수도를 동파시켰을 때에는 살아있는 나무마저 어떻게 추위를 견딜까 걱정스러웠다. 겨울 길이의 느낌은 나이와도 관계가 있나보다. 해가 더해갈수록 겨울은 쉬이 물러가지 않고 봄이 늦게 찾아오는 것 같다. 올 봄은 기다리다 지쳐 몇 번을 찾으러 다녔다.

  늦장을 부리던 봄이 마침내 찾아오더니, 살구꽃, 개나리, 진달래를 피워내고는, 무심천 벚꽃을 찾아갈 여유도 내게 주지 않고 재빠르게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어느덧 집 앞 은행나무가 무성한 잎을 자랑할 때에 신기한 일이 내 앞에 벌어졌다.

  수시로 들락거리던 뒤뜰에서 변화가 없던 고동빛깔 남천나무 옆구리에서 잎들이 몇 개 돋아나는 걸 아내가 본 게다. 아내는 나를 불러내어 줄기가 돋고 잎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한다. 그동안 죽었다고 뽑아내지 않은 게 얼마나 잘한 일인가. 옆에서 탈 없이 살고 있는 남천과 비교하면 크기나 부피가 삼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부실한 남천은 우리 부부에게 특별한 사연이 있는 나무가 되었다. 주변의 나무와 구별되는, 더 크고 튼실한 남천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다.

  내가 남천나무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다른 것들과 달리 그 외적인 모습이 부실하달만큼 왜소하고 약해보이는 데 있다. 그런 면에서 죽은 듯했던 한 그루에 더 많은 관심이 갔다. 이 땅에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든 좋은 것에서 그들은 제외된 것 같지만 정작 하늘의 은총을 더 많이 느끼는 이들은 그들이라고 생각한다. 부유하고 힘 있는 이들도, 알고 보면 한두 가지 고민은 다 가지고 있다. 오히려 그들의 고민은 돈과 권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다. 힘없는 이들은 작은 것 하나에도 감격하고 눈물겨워하지만, 유력한 이들은 대단한 것에도 심드렁하다.

  시원찮은 남천나무가 다시 살아남이 힘없는 이들에게 보여주는 희망의 싹이라고 믿고 싶다.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자신의 몫을 꾸준히 하다보면 기회가 찾아오리라. 그리스 로마 신화의 피그말리온은 피가 통하지도 않는 조각상을 만들어놓고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며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신도 피그말리온의 순수한 기대와 탄원을 받아들여 조각상을 사람으로 변하게 한다.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난다. 그것은 힘겨운 이들이 희망 속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또 하나의 이유다.

  시원찮은 남천나무가 살아난 걸 감격하는 진짜 이유는 내가 또 하나의 부실한 남천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다하게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내 모습이 죽은 듯한 남천나무 같고,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흐를수록 탈색되고 잎이 떨어지는 그 나무와 다르지 않음이다. 그래도 스스로 기대를 거두지 않고 꾸준히 내 갈 길을 가련다. 어느 땐가, 옆구리에 가느다란 줄기 솟고 파란 잎들 돋아나기 시작해, 나뿐 아니라 남들에게도 희망을 전해줄 수 있는 다시 살아나는 존재가 될 것을 믿고 있다. 나는 또 다른 피그말리온이고 싶은 게다.

  다시 살아난 남천나무는 내게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