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생각
부모님 생각
높은 곳에 있어 우리 집은‘꼭대기 집’이었다. 더 높이 있는 건 절[寺]뿐이었다. 산 아래 무덤을 지나 폭 들어간 곳에 외돌아 앉은 조그마한 집, 어릴 때 내 살던 집이다. 비가 오면 마당 옆으로 경사를 따라 물이 흐르고, 비스듬한 언덕은 집을 둘러싸고 있었다. 호젓한 길엔 키 낮은 풀들이 듬성듬성 나고 길가엔 오리나무, 찔레나무들이 자랐다. 동쪽과 남쪽엔 조그만 채소밭이 자리했었다.
형편이 어려워 친척의 도움으로 마련한 집, 내게는 자연과 함께 하는 놀이터였다. 때를 따라 나팔꽃, 호박꽃, 장다리가 피고 벌, 나비와 온갖 벌레들이 찾아왔다. 한 여름 소나기가 쏟아지면 개구리가 뛰어들고, 학교 가는 길에는 들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났었다.
어린 시절, 누구나 그렇듯이 우리 집이 대단한 줄 알았고, 친척들 왕래가 적어 몰락한 양반이려니 했다. 서너 대만 위로 올라가면 유력한 벼슬을 한 조상이 있을 줄 알았다. 나이 들어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모난 돌이 정 맞는 다고, 유력한 가문이면 한말과 일제 강점기, 해방 전후의 혼란기와 한국동란 또 민주화시기를 거치는 동안 눈에 띄는 일이나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흔적조차 없었다.
청주시에 살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 전기가 들어오고, 내 책상을 처음으로 가져 본 게 중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였다. 우리 집은 늘 가난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아버지는 가족들을 위해 많은 애를 쓰셨지만 무능했다. 농사철에는 남의 집 일도 하고, 구슬 만들기, 자리 짜기, 냉차장수, 장돌뱅이를 하셨지만 그다지 잘 된 일은 없었다. 한 해가 다르게 자녀들이 자라나고 가정형편은 나아지지 않으니 아버지도 많이 답답하셨을 게다.
아버지는 어린 막내인 내게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다. 모심는 일을 하면 논우렁이를 잡아다 주기도 하고, 나들이를 할 때면 데리고 가고 한여름 냉차장사를 할 때는 아침부터 온종일 막내와 함께 하곤 하셨다.
어머니는 생활력이 강하고 치밀하셨다. 장에서 팔다 가져온 강아지나 닭이 집을 나가면 온 동네를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냈다. 한동안 가게를 크게 하던 동생 집에서 잔일을 하면서 가족 생계를 해결하기도 하셨다. 방이 두 칸일 때는 나이가 든 큰형과 작은 형이 윗방을 쓰고 부모님과 누나와 내가 안방을 썼다. 불편이 많았을 테지만 내게는 더없이 좋은 기억이었다. 다른 가정도 모두 그렇게 지내는 줄만 알았다.
형들과 누나는 높은 언덕 아래 외돌아진 작은 집이 초라하고 부끄러웠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오히려 아늑하고 포근했다. 장독대와 밭과 경사진 언덕에는 철따라 푸나무와 그 꽃들이 피어나고 울안의 뽕나무와 야생 보리수는 온통 내 눈과 입을 즐겁게 해 주었다.
학교에서 늦게 돌아올 때에는 깜깜하고 호젓한 골목길을 두려움 속에 막내혼자 타박타박 걸어올 게 걱정되셨는지 어머니는 큰길가까지 나와 있다가 내 모습이 보이면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곤 하셨다.
어머니에 대해 잊지 못하는 건, 늘 가난하게 사셔서 어떤 일이든 하지 않으면 불안해 하셨다. 노년에는 중앙공원근처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떼기 장사를 하셨다. 형들이 몇 번 말려 보았지만 어머니의 고집과 의지를 꺾지 못했다. 그 도움을 가장 많이 받은 게 나였다. 어머니는 젊어서부터 속병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병을 가라앉히려 담배를 배우고 가끔 술을 드셨다. 자주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른다며 그것이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하셨다. 말년에는 나와 함께 두 해 가까이 사셨는데 자주 의견충돌이 있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철이 들었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이제와 마음이 아프다.
먹고 입을 것들이 풍성하고 삶이 편해진 시절을 살면서 춥고 배고픈 시대를 살다 가신 부모님이 더욱 그립다. 하루하루 자식들을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길러주신 그 은혜를 어찌 잊으랴. 부모님과 함께 살던 그 때가 생각난다. 한적한 산 아래 집에 살면서도 ‘바위백이 집, 내수네 집, 운전하는 집, 영선이네 집, 은수네 집’하며 살던, 다 같이 가난하고 힘겨웠지만 이웃이 있던 지난날로 며칠쯤 돌아가 살고 싶다.
벌써 어머니 돌아가신지 30년이 되어간다. 그 때 내 나이가 지금의 큰 애 나이와 별 차이가 없다.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주었나 생각하니 새삼 부모님이 존경스럽다. 자녀들이 나와 아내에게 하는 것을 돌아보면 더욱 부끄럽고 민망하기만 하다. 두어 시간이면 다녀올 운동동 마을 조금 빗겨난 곳에 함께 누워 계신 분들을 자주 찾아뵙지도 못함이 더욱 죄스럽고 송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