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각

반드시, 밀물은 오리라

변두리1 2018. 3. 28. 22:46

반드시, 밀물은 오리라

 

  녹슨 큰 배와 작은 배, 그 옆에 비교적 깔끔한 두세 사람이 탈만한 배가 있다. 갯벌 흙이 다 드러나고 방파제 너머에 놓인 드럼통 서너 개. 얼마나 자세히 그렸는지 잔 돌 하나까지 보일 듯하다. 드럼통에 낀 녹과 부식된 부분이 선명하다. 컬러 사진을 보는 것 같으면서도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해 편안하다. 들여다볼수록 바다도 그냥 바다가 아니다. 산들의 색이 조금씩 다르고 하늘도 얼핏 보아도 서너 가지 색이다.

  설명이 있는 그림책을 보는 중이다. 화단(畫壇)의 지명도도 알 수 없는, 내게는 생소한 이가 낸 수필형식의 책이다. 글쓴이의 그림이 곳곳에 있다. 자신의 분야에 미칠수록 완성도가 높아진다는 꼭지 끝에 넣은 그림에 작업과정의 일부를 기록해 놓았다. 볼 때마다 달라지는 갯벌 흙을 그리기 위해 덧칠하고 벗겨내면서 버린 물감이 한 통은 족히 될 거란다. 그 일에 든 작업시간도 몇 날 며칠일 거란다. 그림에서 십분의 일도 안 되는 부분, 주제를 드러내는 곳도, 눈이 자주 가는 데도 아니지만 마음에 찰 때까지 수도 없이 그리고 지우고를 되풀이 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예술을 하고 작품을 만드는 이들의 마음이 느껴져 온다. 그들의 치열한 삶의 자세를 옆에서 보는 듯하다. 좋아 하는 일이니 하지 남이 시켜서는 못하리라. 그렇게 한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작업현장을 벗어나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을 것만 같다. 자신들의 작품에 그들은 만족하려나. 그 작품을 구매하는 이들에게는 어떤 감정을 느낄까. 저자는 비슷해 보이는 수채화 작품을 같은 구도로 열 개쯤 그린 적이 있단다. 완성도가 높은 것이 열이면 버린 건 더 많았을 게다. 그중에 하나를 팔고 또 하나는 자신이 소장하고 나머지는 불에 태웠다고 한다. 그게 자신의 그림을 소장한 이에 대한 예의이고, 그림의 가치를 높여야 할 화가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했단다.

  그 치열(熾烈)하고 개결(介潔)한 삶의 자세에 마음이 끌린다. 유명인이라고 왜 무명의 시절이 없었을까. 탄탄한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직장을 그만두고 좁은 길을 택해 고생스런 삶을 살았다. 열심히 해도 안 되는 때가 있었나 보다. 아이 우유 값이 석 달이나 밀리고 기본적인 삶이 안 되던 과거를 회상한다. 이제는 당당하고 화려하다. 몇 권의 책을 썼고 대표작이랄 수 있는 그림도 여러 점에, 수상 경력도 다채롭다.

  벗겨내고 덧칠하고 그리고 지우기를 며칠 동안이나 하고 그 일에 물감 한 통은 족히 섰으리라는 그림 제목이 반드시, 밀물은 오리라이다. 모르긴 해도 힘겨운 시절에 그린 작품일 듯하다. 저자는 서른아홉에 미술대학에 입학한다. 그런데 이 그림은 서른여섯에 그렸다. 마흔한 살에 큰 상을 받고 대학을 졸업한 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괜찮은 직장을 그만두고 미술을 한다고 했을 때 겪었을 주변의 따가운 눈총과 염려들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혼자 작업했을 몇 년의 세월들. 알아주는 이 없고, 고정적 수입도 없이, 산다는 게 막막하기만 했을 게다. 그 어간에 그리고 완성했을, 눈물 어린 잊지 못할 작품이리라. 그래선지 작가는 무작정 서해를 찾아가 스케치하고 그를 바탕으로 그려낸 이 작품에 에피소드가 가장 많다고 밝히고 있다.

  제목이 많은 걸 말해주는 듯하다. ‘반드시하고 확신과 신념을 강조하고, 기원하듯 쉼표를 찍었다. 그 뒤에 붙인 말이 밀물은 오리라이다. 얼마나 막막한 현실이며 절실한 꿈인가. 자신의 삶에 밀물이 반드시 오리라는 건 뒤집어 놓으면 그만큼 가변적이며 불안하다는 게 아닐까. 작가는 암담한 현실에서 자신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통로를 대한민국미술대전으로 정하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작품을 완성했을 게다. 몇 번의 낙선을 거쳐 입선한 작품이 이 작품이란다. 여러 번 작업을 해서 인지 같은 제목의 비슷한 그림도 있다.

  혼을 쏟아 부은 작품은 대표작이 되고 곧바로 작가를 연상하게 한다. 지금은 초라하게 갯벌 위에 얹혀 있어도 언젠가 밀물이 올 때는 보란 듯이 거센 물결을 헤치고 대양으로 가리라. 희망이 삶을 지탱해 주고, 노력이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 준다.

  무엇을 작품(作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은 노동력을 가하면 어디에나 쓸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은 다를 듯하다. 적어도 세 사람[몫의 노력은 부어져야 할 것 같다. 그보다 더욱 빼어난 게 걸작(傑作)이라 하면 하나의 걸작을 이루려면 시간과 열과 성을 얼마나 쏟아 부어야 할까.

  삶이 끝나는 날, 주어진 재능과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드러난다. 모두가 ()’을 했다고는 할 수 있지만 ()’까지 붙이기는 만만하지 않을 게다. 더구나 걸작(傑作)’이라 하기는 결코 쉽지 않으리라.

  쉽지 않으니 도전할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 비록 재능이 미미하나 생전에 걸작 하나 남기는, 걸작 인생을 살고 싶은 것이 내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요 꿈이다. 내게도 반드시, 밀물이 오리라는 걸 의심하지 않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