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의 소원
고슴도치의 소원
- 어른을 위한 색다른 동화 -
두껍지도 않고 글이 빽빽하지도 않다. 중간 중간 그림도 있어 만만해 보였다. 대들어 읽어보니 그게 아니다. 논리와 이야기구성에 중독이 되어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해석의 여지가 무궁무진하다. 분명한 줄거리가 없다는 거다. 어떤 이가 제목만 보고 자녀에게 사 주었단다. 얼마 지나 어떠냐고 물어보니 “고슴도치가 가시가 많아 동물들이 싫어 해”라고 하더란다. 무엇이든 자기 수준에서 받아들인다. 그게 정상이다. 누가 나에게 어땠냐고 묻는다면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 읽고 싶지 않은 책이다’라고 할 것 같다.
고슴도치가 주인공이다. 그는 어떤 일에도 망설이고 자신의 가시 때문에 고민이 많다. 많은 동물들을 집으로 초대하려고 편지를 쓴다. 그렇지만 부치지는 않는다. 생각을 하면 그 동물들이 들이 닥친다. 자신에 대해 열등감이 없는 이가 누가 있을까. 그런 이가 있다면 제 정신을 갖고 있지 않거나 바보일 게다. 몇 개의 가능성을 두고 선택을 고민하거나 하나뿐이면 실행여부를 두고 어려움을 겪는 게 우리 자신들임을 누가 모르랴.
고슴도치에게 찾아와 어떤 동물은 행패에 가까운 피해를 준다. 코뿔소와 하마 같은 이들이다. 그들은 별반 미안한 기색도 없고 너무도 당당하다. 현실의 일상에도 그런 이들이 적지 않다. 개인의 생각으로는 그런 류의 존재들은 한 번 만나는 것으로 족한 듯하다. 빤히 알면서 거듭 곤란을 당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 싶다.
어떤 이들은 오래 기억 속에 남고 좋은 추억이 된다. 나이팅게일과 다람쥐 같은 이들이다. 우리 삶에도 이런 이들이 있다. 이들은 거듭 만나고 싶다. 여러 사정으로 만나지 못할 때도 그리운 이들이다. 이런 부류의 상대들을 자주 만나는 게 여러 면에 도움이 될 듯하다. 유한한 세월을 사는 이 땅에서 만나고 싶은 이들을 만나기에도 짧은 인생을 힘겹게 살아갈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이야기 전편에 걸쳐 거북이와 달팽이가 등장한다. 다른 동물들은 한 번 쯤 나오고 말지만 이들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달팽이는 거북이를 가리켜 ‘번개’라고 한다. 우화 “토끼와 거북이”로 알려졌듯이 거북이는 느림의 상징 아닌가. 우리의 판단이 얼마나 상대적인가를 돌아본다. 달팽이에게는 우리가 5분에 갈 수 있는 거리가 몇 달이 걸리는 먼 길일 게다. 그들은 수시로 티격태격 다툰다. 심지어는 고슴도치의 집에도 거북이만 방문한다. 거북이에게 달팽이의 속도가 인내의 한계를 넘어 선 게다. 그래도 거북이는 달팽이를 친구라 부르며 다시 찾아간다. 인생길에 거북이와 달팽이 같은 친구 하나 없다면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울까. 만나면 다툼이 끊이지 않아도 싸우며 정든다고 다정하고 서로로 인해 삶이 푸근하리라.
이야기는 단순하지 않다. 개미는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복잡한 거라며 자신이 가장 단순하며 복잡한 존재라고 말한다. 단순과 복잡이 따로 있을까. 많은 동물들이 자기 방식대로 등장하고 행동한다. 인간세계도 수많은 기준이 있다. 미의 기준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같지 않았다.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 고슴도치는 자신의 가시로는 합창을 할 수 있지만 기린의 뿔로는 이중창 밖에 할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의 것을 긍정적으로 극대화한다면 그것이 힘이 된다. 고슴도치가 찾아올 동물들을 배려해 갖가지 케이크를 만들지만 동물들은 싫어하는 것들을 본다. 차라리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야겠다는 고슴도치의 결심이 현명하지 않은가.
꼭 다른 동물들을 초대하고 그들의 집에 찾아가야 하는가. 절대적인 답은 없으니 자신의 판단을 존중할 일이다. 초청을 하면서도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다.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면 굳이 얽매일 일이 아니다. 손님을 맞을 준비도 결정적인 게 아니다. 여러 가지를 대접받은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만족도는 모두 다르고 혼자 혹은 다 같이 이야기하고 춤을 추면서 만족을 느끼기도 하고 더러는 부족함이나 푸대접을 받았다고도 한다. 우리의 삶에서도 정서적 유대와 일치가 중요하다. 사회가 먹을 것과 소유가 문제되지는 않는다. 존중과 배려가 서로의 평가를 좌우한다. 그마저도 기준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고슴도치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초대했을까. 그 중에 또 얼마의 동물들이 와 주었을까. 그걸 고슴도치가 원했을까. 기뻐하기는 했을까. 많은 이들을 초대했다면 그것이 잘한 일일까. 사이가 좋은 소수만 초대해 즐기는 게 낫지 않았을까. 글쓴이 톤 텔레헨도 정답을 주지 않고 누구도 어느 게 맞다 할 수 없다. 글을 통해 전달하려는 것도 그것이 아닐까.
내 주변이나 내 안에 있는 모든 기준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까. 적어도 남의 눈과 관습으로 불행한 삶을 택하지는 말아야겠다. 자신에 대해 좀 더 자신 있게 살아가는 게 행복하리라.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가능한 답을 인정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내 사고방식이 지나치게 경직된 게 아닌가를 돌아본다. 하나의 답이 아니라서 이야기와 논리가 분명하지 않아서 많은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글이어서 반가웠다. 고정된 틀에 갇힌 듯한 나는 그래도 뭔가 아쉽고 허전하다. 더 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