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새 내린 비
밤 새 내린 비
투드락 투드락 투둑, 빗소리가 귓가에 내려앉는다. 가는 겨울이 아쉬움에 흘리는 눈물인가, 첫발을 디디는 봄이 겨우내 쌓인 먼지를 닦아내려는 몸짓인가. 서너 달 춥고 메말랐던 사람들의 가슴을 촉촉이 적시려나 보다. 자다 깨다를 되풀이 하며 빗소리를 듣는다. 어쩌면 한 하늘아래 같은 빗소리를 들으며 사십이 다 되어가는 자식들 혼사걱정에 몸을 뒤채는 이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낮에 본 풍경들이 떠오른다. 들판에 푸른빛은 돌지 않아도 겨울이 채비를 하고 떠나고 있음이 분명하다. 서로 한을 품은 듯 머리채 잡고 놓지 않던 흙들도 타의에 의한 갈아엎음에 갈라서고, 며칠째 따듯해진 기운에 제풀에 서로 놓아버린 곳도 많을 듯하다. 올려다본 산봉우리엔 녹지 않은 허연 눈들이 여전히 이곳은 겨울이 영역이라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어둠이 내리며 빗방울이 듣기 시작하더니 빗소리가 점차 커지고 급기야 천둥도 몇 차례 울었다. 마음 여린 봄이 밤을 틈타 들어오나 보다. 많은 이들이 속히 봄이 이 땅에 진주해 주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따사로운 햇살과 훈훈한 바람보다, 마른 나무와 적막한 대지를 적시는 촉촉한 봄비가 더욱 반갑다. 오래 전 돌아가신 어머니는 비를 싫어하셨다. 비 오기 전에는 꼭 삭신이 쑤신다 하셨다. 한 평생 자식들 위해 험한 일 가리지 않느라 자신을 돌볼 겨를 있으셨을까. 가끔 한두 마디 하시는 말씀이라도 살갑게 답해드려야 했는데 왜 그때는 야속함만 앞섰는지 모른다. 어머니 돌아가실 적 70여세, 내 나이 30대 초반. 내게는 하고픈 일이 너무도 많고 남은 듯싶은 인생은 길고 아픈 곳 없어,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언뜻언뜻 몸의 여기저기서 보내오는 이상신호를 접하며 이제야 어머니의 서러움 한 가닥을 조금 알 듯하다.
대지를 적시는 반가운 빗소리에 왜 나는 자주 깨어 뒤척이며 단잠을 이루지 못하나. 춥고 지루한 겨울이 가고 새봄이 오기를 그토록 기다렸던가. 유독 이 겨울이 길게만 느껴지고 봄이 더디 오는 듯해 조바심을 내는가. 내 삶의 중년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다 멋져 보이고 나만 초라하게 느껴져 그런 것도 같다. 별 다른 뜻 없이 하는 그들의 이야기에도 자격지심이 든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다 자신들의 삶을 사는 것이니 주눅들 일이 아니지만 성과 없이 지내온 긴 세월이 민망하기만 하다. 때론 지난날의 친구들이 무척이나 그립긴 해도 괜한 열등의식에 젖느니 그런 자리에 끼고 싶지 않다.
“그런 거 다 부질없는 거여, 지나고 보면 아무 차이 없어.”맞는 말이다. 긴 세월 흐르면 어느 해 겨울이 유독 기억에 남지 않는다. 바람 불고 눈 내리고 미끄럽지 않았던 겨울이 있었던가. 돌이켜 보면 요즘처럼 편하게 겨울을 난 시절이 없었지 싶다. 먹고 입고 땔 것 걱정 없이 겨울을 보내게 된 게 우리 역사에 얼마나 되었나. 겨우내 녹지 않았던 거대한 얼음들, 허옇게 쌓인 눈, 부실한 입성, 방안이 추워 함께 한 햇볕바라기, 허술한 먹을거리들. 지나간 날들이 아스라하다.
밤 새 내리는 비는 겨울을 보내고 봄을 데려다 우리 곁에 놓을 게다. 추위를 모르는 아이들은 재깔거리며 학교로 가고 청소년들은 자기들끼리 울끈 불끈하며 망아지들처럼 뛰리라. 냇가와 밭둑에는 푸른 색 풀들 돋아나고 도로에는 칙칙하고 무거운 옷들 물러가고 원색의 경쾌함이 물결칠게다. 아련한 듯 지나간 겨울을 잊고 찾아올 여름도 기대하리라. 산과 들에는 파랑 노랑 분홍의 꽃 잔치가 흐드러질 테고….
빗소리 속에 날이 새고 있다. 창문이 뿌윰하게 밝아오고 신문 떨어지는 소리도 들린 듯하다. 근심과 염려가 말갛게 씻긴 때가 있기나 했던가. 나라나 집안이나 할 일은 그치지 않고 어느 것 하나 녹록치 않았다. 어려운 시절들도 지나고 나면 그리움의 빛깔로 덧칠이 된다. 모두가 어려웠던 그 시절 친구들이 보고 싶다.
막혔던 관계가 풀리듯 언 땅이 녹고 그쳤던 냇물이 다시 졸졸거리며 흐른다. 겨우내 문밖출입이 뜸했던 이들이 하나둘 거리로 나오고 친지들 자녀의 혼사소식이 들려온다. 어김없이 좋은 시절이 다가오고 있다. 초조함에 연거푸 나선 나들이에도 찾지 못했던 봄이 비와 함께 스르르 내 곁으로 다가와 밖으로 나가보라고 예년처럼 소리칠 게다.
새해가 밝은지 두 달이 지났다. 한 해의 다짐이 새롭기만 할 뿐, 이렇다 할 실천 없이 봄을 맞는다. 이렇게 지내온 날 들이 몇 해였던가. 한 순간 낮 기온이 십도를 웃돌고 아직 겨울이 머물러 있지 싶은데 봄 햇살처럼 따사로웠다. 밤 새 비 내리고 돌연 봄으로 변하듯 지난 세월과는 다른 한 해를 살고 싶다. 연초 마음에 다진 일들을 반이라도 이루면 좋겠다. 수수만년 겨울이 가고 봄은 오는데, 나는 왜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기가 어려운가.
겨우내 집안에 머물던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밤 새 내린 비를 보러 가경천에 가 보아야겠다. 어제까지 오지 않았던 반가운 풀 친구들이 핼쑥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비 끝에 개운해진 밖으로 나서니 길은 젖어있고 비는 그치고 간밤에 온 봄은 학교 가는 아이들 해사한 얼굴과 그들끼리 재재거리는 말소리 속에 벌써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