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문화

부부로 산다는 것

변두리1 2018. 3. 3. 19:02

부부로 산다는 것

 

   성장배경을 비롯해 모든 것이 서로 다른 남녀가 스물이 넘은 어느 날 만나서 삶을 다할 때까지 때로는 5~60년을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지구상의 수많은 생물 종류 가운데 이런 무리가 몇이나 될까. 수만 년 인류사에서 지속적으로 이런 형태가 이어져 왔을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서구사회를 필두로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부자연스런 관습이 어떤 종착지에 이를까도 궁금하다.

   우리 사회의 결혼관습을 유지해오던 기둥들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열녀문과 열녀불사이부 같은 문구로 상징되는 유교의 가르침이 힘을 잃은 지 오래다. 가문보다는 개인의 행복추구가 우선되고 이혼이 흉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 부자연스러운 결혼생활이 이어지려면 그것을 강요하는 사회분위기나 한편이 현저히 기울어진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현대 사회는 사회분위기도 양성평등을 넘어 여성우위로 향하고 인권과 경제력에도 큰 차이가 없어지고 있다.

   여성들의 지식이 증가하며 권리가 신장되면서 어느 한편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 불가능해졌다. 여성들의 사회진출과 경제력의 확보는 반드시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인간적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의 도시화와 익명성으로 주변을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도 없어졌다. 현실적으로 이루어진 이혼 후의 삶이 불행한 결혼의 지속보다 나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형편에 따라 다른 더 나은 상대를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음을 보고 듣기도 한다.

   이제 어쩌면 서로가 자유를 얻었다고 느낄지 모른다. 한 번의 결혼이 평생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재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것이 시대적 흐름이고 합리적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어차피 제대로 맞지 않는 것을 심각한 마찰을 겪으며 억지로 맞춰갈 이유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결혼생활이 혼자 사는 것보다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혼자라면 거리낄 것이 무언가.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원하는 대로 한다고 해서 안 된다고 할 이가 없다. 하지만 결혼은 적어도 두 사람이 관련되어 있다. 게다가 서로의 가문과 자녀들이 연결된다.

   그러니 점점 결혼제도를 탐탐하게 여기지 않는 이들이 늘어가고 이상한 편법들이 등장한다. 계약 결혼, 인턴 결혼, 혼전 동거 같은 실험적 방식들이 생겨난다. 기존의 제도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자녀도 부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녀양육을 정교히 정하고 부모는 양로원이나 요양원에 모시며 그 부담을 국가에 지운다. 어떤 것에도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으니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 흐름에 여전히 합류하지 않고 전통을 굳건히 지켜가려는 이들이 있다. 이른바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다. 나는 어설픈 그리스도인이다. 보수라면 내가 아니라고 할 것이고 내가 진보라면 주변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우리의 전통적인 결혼제도에 문제가 적지 않음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해서 서구를 닮아가는 추세가 옳다고 지지하고 싶지는 않다. 여러 문제가 분명히 있고 현재 취하는 방식이 보다 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나 절대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근거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의 배우자를 자신이 선택했다고 여기지 않는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서로의 모든 것을 아시고 최선의 상대를 맺어주셨다고 고백한다. 또한 자신들의 결혼에 거룩한 뜻과 목적이 있다고 믿는다. 현재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얼마든지 변화될 여지가 있고 하나님께서 그 변화를 이끄신다고 인정한다.

   자신의 결정으로 이혼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이거나 비 그리스도인 가운데 스스로의 결정이 현명하지 않았다고 인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으리라. 처음에는 좋아보이던 이들도 시간이 흐르면 큰 차이가 없으며 오히려 가정의 해체로 인한 자녀들과 스스로의 고통이 결코 적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이 솔직함일 것이다. 한 번 이루어진 것을 깨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기보다는 한번 참고 서로 소통하고 배려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하며 위기를 넘어가는 일이 훨씬 현명하리라.

   이제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당하거나 말없이 참기만 하는 시대는 아니며 그것은 옳지도 않다. 아픔이 있다면 어느 편이든 드러내고 적극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누구나 미래뿐 아니라 현재도 처음 살아보는 경험하지 못한 분야다. 시행착오가 없다면 인간이 아니다. 실수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반복하지 않는 길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 상담이나 서적의 많은 내용이 자녀와 가정을 생각해서 한 번 더 참고 상대에게 더 잘해주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이다. 가정을 파괴하라고 조언할 수야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이 정해진 이야기의 과정을 듣고 있는 셈이다. 그런 뻔한 과정에서 힘을 얻기는 어렵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음을 받아들이라. 어려움을 통해 부부 모두에게 그리고 자녀들과 모든 가족 구성원에게 주실 교훈이 있음을 믿자. 비온 후 땅이 굳어지듯 어려움을 지나면 가족들이 사랑과 이해로 더 견고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