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함께

미소 한 잔 눈물 두 스푼

변두리1 2018. 2. 3. 19:37

미소 한 잔 눈물 두 스푼

- 방송인 허수경의 젊은 날 화려한 아픔 -

 

   책 뒤표지가 저자 사진이다. 얼굴에 커다란 자신이 있나보다. 그 모습이 산속에서 보는 머루처럼 청량하다. 이름은 익숙해도 얼굴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오래전, 1995년에 출간된 책이다. 무려 23년 전, 그런데도 별다른 시간의 벽을 느끼지 못했다. 화려한 방송의 표면만 보다가 그 뒷이야기를 대하니 방송계의 민낯과 그들의 힘겨운 순간들을 보는 듯하다.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하고 별 연관성을 찾기 어려운 방송사회자의 길로 들어서 자타가 인정하는 성공을 이룬 저자가 참 대견하다.

   대학 졸업반 시절, 글쓴이가 취업을 준비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TV에서 뉴스를 진행하는 여자 아나운서를 보다가 너도 아나운서해 보라고 했단다. 이어서 얼마 후에는 문화방송 MC 공채 1기의 응시원서를 가져다 주셔서 얼떨결에 응시해 2001의 경쟁에서 살아남아 방송인으로 입문했단다. 입사 자체로 성공일 줄 알았던 방송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초창기에 맡았던 프로그램에서 이렇다 할 역할이 없고 동료와의 오해가 있었는지 이 년여 세월을 버티다 방송을 그만두게 된다.

   그녀를 다시 방송의 세상으로 끌어낸 것은 정보데이트라는 5분짜리 방송이었다. 한 프로덕션의 PD로부터 막무가내로 한 번 만나자는 전화가 오고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의 조금은 무시하는 태도에서 한번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고 기세 좋게 그만두겠다는 오기가 생겼던 모양이다. 쉬운 일인 줄 알았지만 아주 힘겨웠고 그만큼 배운 게 많았던 모양이다. 쉴 새 없이 이야기해야 하니 외울게 엄청 많아 어려웠는데 나중에는 외우지 않고 이해해서 잘 진행했다고 한다.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후에는 그녀를 각인시키는 프로그램이 된 듯하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연애를 하고 결혼에 이르는 험난한 과정이 애처롭다. 부모의 허락을 받지 못하고 양가부모가 참석하지 않은 채 치르는 결혼식, 못내 그리워 허위허위 찾아와 유리창 너머 딸을 바라보시는 어머니, 결혼식을 하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어른대는 것 같다. 딸이 결혼하고 가족명부에서 지워진 걸 보는 아버지의 심정과 결혼 후 일 년이 넘어 어머니에게서 걸려온 전화, 서운함과 그리움 그리고 화해와 용서가 용해되어 쏟아지는 어머니의 사연들, 그러고도 두 해가 더 지나 이루어진 아버지와의 만남, 아버지의 편지 형식으로 서술된 길고도 힘들었던 마음과 나날들. 가족과 자녀 그리고 부모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애틋한 글들이다.

   방송인들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생방송에 대한 부담감과 시간과의 싸움, 아침에 벌이는 아홉 개의 자명종 시계와의 전투는 그들이 얼마나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말해준다. 개편 때마다 그들이 겪는다는 증상들도 공감이 가고 연민이 인다. 그들을 연민의 대상이라 하는 게 맞지 않는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방송인이 되기를 꿈꾸고 원하는가. 시청자들이 보기에는 그것도 행복한 질병이랄 수 있다. 그의 삶의 자세가 건실하다. 수수한 모습으로 비쳐지고 싶고 MC는 벼락출세가 어려우니 자신은 늦깎이가 아니라 점점 익어져간다는 인식이 숙연한 삶의 교훈으로 다가온다.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를 모두 엄마라고 부른다는 부분에서 지은이의 살아가는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당차고 합리적인 현대 여성의 지혜로운 삶이다. 길게 전화를 거는 이에게 항의하는 장면은 또 다른 정의감을 느끼게 한다. 방송의 힘만큼이나 역작용도 있다. 고단한 삶을 사는 이들을 도우려하는 의도를 알면서도 외면하고 때로는 억측으로 어려움을 자아내고 뜻하지 않게 생각지 않은 이들에게 고통을 주게 되기도 한다. 한 가지 사건에 사람들의 이익과 손해가 맞물려 있다. 어떤 시각으로 접근하는가에 따라 결과와 반응과 파장이 현저하게 다를 수 있다.

   산다는 것, 그것도 잘 산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음을 실감한다. 그러한 자신을 드러내기는 더욱 어렵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그 일을 해낸 저자가 신통할 뿐이다. 한 때 잘 나가기도 어렵다. 그리고 그런 삶이 오래 지속되기는 더 어렵다. 그게 방송계라고 하면 더 말할 게 없을 듯하다. 한 때 TV를 켜기만 하면 여기저기서 활약하던 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고 그 기간도 더욱 짧아진다고 한다. 그 많은 이들이 얼마나 긴장감과 부담을 느끼고 방송에 임하는 것인가. 대중에게서 잊혀져간다는 걸 어떤 심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익숙함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자신을 향상시키는 길이 무엇일까를 거듭 고민하게 된다.

   오래된 글을 읽으면서 글쓴이의 그 후의 삶을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이 출간된 뒤로 저자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걸 다양해진 정보습득으로 알았다. 섣불리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 진지한 고민을 하고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저자도 그러했을 걸 의심치 않는다. 사회의식도 하루가 다르게 변해간다. 그냥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며 소리 없는 응원을 보내고 싶다. 길고 지난한 삶을 든든한 후원자와 함께 흔들리지 않는 잣대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내 젊은 날은 어떤 모습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