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활

돈 파스콸레

변두리1 2017. 12. 23. 21:34

돈 파스콸레

 

 

   익숙하지 않다. 어둠속에 간신히 자리를 찾아 신경을 집중해 보고 있는 오페라, 돈 파스콸레. 뮤지컬과 오페라 구별도 못하면서 어색하게 흐름을 따라 간다. 우리 지역 오페라단 공연이라고 큰 아이가 표를 구해 가족이 함께 온 자리다. 라틴어로 노래를 하는 듯하고 우리말 뜻을 스크린에 띄운다. 무대 진행을 보면서 스크린을 힐끗거리려니 조금은 산만하고 분주하다.

   소재는 익숙하다. 언제나 있음직한 구두쇠 이야기인데 내용보다 음악에 초점이 있는 것 같다. 등장인물도 많지 않고 구성도 단순하다. 음악에 조예가 없으니 덤덤하다. 때로 추운 곳에서 낯선 공연을 보고 있는 나 자신이 낯설고 어색하다. 삼촌과 조카의 대화가 노래로 이어지고 구두쇠인 주인공 돈 파스콸레는 자녀가 없는 재산가로 조카를 돈 많은 집안의 아가씨와 결혼시키려 한다. 그대로만 된다면야 무슨 갈등이 있고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으랴. 삼촌과 조카 사이에 의견이 충돌하고 갈등이 생길 게 뻔하다. 조카가 원하는 결혼상대는 가난한 과부 노리나. 삼촌은 노리나를 못 마땅히 여겨 차라리 자신이 결혼해 아내에게 재산을 물려주려 한다. 자신의 결혼을 선언하며 한 푼도 물려줄 수 없음을 알리고 조카를 몰아내자 돈 파스콸레의 주치의이며, 조카 에르네스토의 친구인 말라테스타가 끼어든다.

   의사 말라테스타는 수도원에서 갓 나온 자신의 동생이라면서 세상물정도 모르고 돈도 쓸 줄 모르는 순수한 아가씨로 소프로니아를 돈 파스콸레에게 소개해 결혼하게 한다. 그녀는 다름 아닌 노리나인데 결혼과 함께 전혀 다른 태도로 돌변해 사치를 일삼고 남편을 무시하고 말도 듣지 않으며 밤에 연극을 보러 외출하면서 잠자리를 거절한다. 최악의 상황을 만난 주인공이 차라리 이혼하게 해달라고 말라테스타에게 요청하자 조카를 결혼시켜 아내로 물러나게 하자는 제안을 한다. 곤경에 처했던 돈 파스콸레는 조카의 결혼상대자 노리나를 찾으려하자 소프로니아가 바로 노리나임을 밝힌다. 호인인 파스콸레는 조카와 노리나의 결혼을 허락하고 노리나의 노래로 오페라는 끝난다.

   새롭거나 감동적이지도 않고 썩 잘 짜인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주안점이 노래에 있고 노래를 듣기 위해 관객들이 모여드나 보다.

   주인공 돈 파스콸레처럼 재물이 많아도 더 가지려한다. 결혼의 주요조건이 재산이 되는 것에 익숙하다. 논리로는 아니라 하면서 현실은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자주 반복되다보니 이제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우리의 관심은 항상 재물과 아름다움과 힘에 쏠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 자신을 돌아본다. 그러한 것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마땅함에도 본능적으로 끌린다는 걸 부인하지 못한다. 그것들이 있어 지키려 하는 것도 아니면서, 없으면 포기하고 추구하지 않으면 될 것을, 한 편으론 포기하고 다른 편은 아쉬워하며 추구하는 이중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땅에 사는 한 물과 공기처럼, 없이는 살아가기 지극히 불편하고 남들에게 무시당하기 쉬운 것들이다. 주인공이 조카의 결혼을 인정하면서 재물을 향한 탐욕에서 한 발 물러나듯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 추운 겨울이 약간은 따듯해질 것만 같다.

   오페라가 끝나고 고생한 관계자들이 무대에 올라 인사를 한다. 오페라단과 합창단의 이름이 라포르짜란다. 영어식으로 바꾸면 더 파워(The Power)' 정도리라.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얼마나 힘들고 무력감을 느꼈으면 이름조차 그렇게 지었을까. 사정을 모르지만 짐작이 간다. 본분을 지키려 애쓰는 그들의 모습이 떠나지 않는다.

   극의 내용은 멀리가고 구두쇠에 관한 상념이 떠나지 않는다. 이 겨울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돈이 없어 불안해하며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살고 있을까. 많은 할머니들이 추위 속에 손을 호호 불며 늦게까지 노점에서 푸성귀를 파시는 것도 조금 더 많은 돈을 손에 쥐기 위해서 일게다.

   점차 돈 관념이 견고해질 아이들, 직장생활 속에 경제를 배우고 익혀갈 그들은 아비 된 나의 경제관을 어떻게 이해할까. 나 스스로 갈팡질팡하고 있으니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눈치 챌 게다. 그래, 인정하기 싫어도 인간은 태어나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늘 갈등과 번민을 안고 사는 존재다. 형이상학을 논하다가도 때가 되면 음식을 섭취해야하고 생명을 살리는 수술을 하고도 치료비를 받아야 하는 육체적이고 경제적인 존재들이다.

   공연장 문을 나서니 찬바람 속에 매서운 추위가 옷 속을 파고들어 몸은 추운데 정신이 번쩍 난다. 어릴 적, 센 불을 땐 온돌방, 이불속 뜨끈한 아랫목이 그립다. 언 몸을 밀어 넣으면 혼곤하고 노곤해지며 스르르 잠이 몰려 왔었다. 얼마 가지 않아 식어버릴 바닥이었지만 달콤하고 행복했었다.

   삼한사온처럼 추위와 따듯함이 반복되는 생활 속에 원하던 노리나와 결혼하게 된 조카처럼 좋은 일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돈 파스콸레, 그래도 그는 인정미 있는 좋은 사람이었다. 이 추운 겨울, 내 주변에 그런 이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면 욕심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