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함께

깊이에의 강요

변두리1 2017. 11. 1. 21:16

깊이에의 강요

- 진지한 허무와 고민 -

 

  역사학을 전공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작품이다. 글을 읽다보면 진지함에 끌려든다. 그런데 결말은 어딘가 허무한가하면 뒤통수를 치는 고민을 안겨준다. 그가 이 책의 마지막 작품인 문학적 건망증에서 던져준 질문이 여운처럼 남는다. 읽어도 얼마가지 않아 다 잊어버릴 걸 무얼 바라고 멈추지 못 하는가. 그것이 내 일상이기를 바라는 거다.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듯이, 그냥 자연스런 삶이어서 그게 생활이라 지속하는 거다.

   소묘를 잘 그리는 화가에게 한 평론가가 행한 재능 있고 작품이 마음에 닿지만 깊이가 없다는 평에 그 작가는 고민에 빠진다. 깊이를 갖기 위해 고민을 하고 애를 쓰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할 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지도 못한다. 쉬는 것은 아닌데, 마음은 더욱 복잡한데 진전은 전혀 없다. 작가는 마침내 죽음을 선택한다. 그가 죽자 평론가는 애석함을 표현하면서 죽음의 단초가 애초부터 감지되었다며 이번에는 그 작가가 그의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깊이를 강요해 왔다고 평했다. 평론가는 작품을 평하는 게 일이다. 문제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을 가지고 평하고, 사심이나 무지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인정하는 권위가 있는 이의 한마디에 그 누구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겸허하게 비평을 받아들이는 건 좋지만 거기에 매이지는 않아야 한다. 작가는 자신의 결점을 누구보다 잘 안다. 또한 누구도 완벽할 수 없다. 그 부족한 면이 그를 다른 이들과 차별화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 결점이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걸로 전체를 망가뜨릴 수는 없다. 그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노력하면서 평생을 가는 것은 어떨까. 자신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자신이 옳을 수도 있고 시대인식이 변할 수도 있다. 적어도 자신의 삶을 대신 살아줄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마을의 노약한 체스꾼과 경험이 적은 청년의 승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승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구경꾼들이 그들의 희망을 젊은이에게 투영한 결과 두 대국자의 모습이 심리 프리즘을 통과하며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다. 젊은이는 졌어도 이긴 것 같고 노인은 이기고도 즐겁지도 않고 주변의 환호도 없다. 어쩌면 둘 모두 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늘 해오던 방식으로 지루한 진행 끝에 거둔 승리는 감흥이 없다. 노인 자신도 그 마을에서 체스를 가장 잘 둔다는 부담스럽고 누추한 멍에를 벗고 싶을 뿐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기대하지만 영웅은 쉽게 나타나지 않고 하루하루의 삶이 연장될 뿐이다.

   뮈사르가 알아낸 온 우주의 조개화, 그것은 뮈사르에게는 경악할만한 재앙이지만 보통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고 심각성을 느끼지도 못한다. 사람과 세상과 우주자체를 조개화하고 있다. 그것은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조개화는 달리 말하면 경직화되는 것이고 숨길이 점점 막혀가는 게다. 내게는 눈에 보이는 가장 구체적인 현상은 지구의 많은 땅들이 시멘트와 아스팔트에 묻혀가는 것이다. 흙길을 보기 어려워진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웬만한 냇물은 어느새 복개가 되고 길이 되어있다. 마당도 포장이 되고 운동장도 우레탄이 깔려있다.

   맨 땅에는 풀과 나무와 벌레들이 살 수 있다. 하지만 포장된 곳에는 아무 것도 생명활동을 하지 못한다. 땅이 가진 생명의 기운이 포장이 되어 막혀 버려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기운이 흐르던 곳에 시멘트가 들어와 흐름을 막아 생기의 흐름이 여기저기 막혀있다. 이런 현상을 발전이라고 좋아하고 있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그것은 발전이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이라 호소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많은 벌레와 식물들이 우리 삶의 터전에서 사라졌다. 그것을 위생이 향상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만큼 생명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이 훼손된 것이다. 인간중심의 해충들이 사라진다고 생각하지만 조금 더 느리게 함께 있어 주었으면 하는 존재들도 사라져 갈 것이다.

   똑똑한 줄 아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부()의 창출(創出)이라는 허황된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빠르고도 넓은 조개화를 진행시키고 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새로운 생각을 하지 못하는 늙은이에게 도전했던 패기에 찬 젊은이는 지혜와 기술의 부족으로 패하고 만다. 그래도 그들에게 우리의 희망이 있다. 한 편에서는 예전에 형성된 허울뿐인 권위에 의지해 알지 못하는 말들을 무책임하게 쏟아내고 나약한 젊은이들은 또 그 덫을 헤어나지 못하고 생명을 잃고 있다. 자신에의 확신이 필요하다. 비록 결정적인 부족함이 있다 해도 자신의 것이라도 지킬 수 있으면 좋겠다. 혼자서 세상을 책임지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다양한 이들이 다채로운 색상을 펼치므로 이 세상은 아름답고 살만한 곳이 된다. 그러기에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일상사가 중요하다. 그것들이 우리 삶의 바탕이다. 토대는 높지 않지만 굳건히 바닥을 이루어주므로 높은 산이 그곳에 있을 수 있다. 우리 삶에 지금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화석화는 어떤 부분인가를 찾아 그 현상을 멈추게 하자. 먼저 인간중심의 지나친 욕심을 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