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월(蜜月)과 공월(空月)
밀월(蜜月)과 공월(空月)
공월(空月)이란 말은 없다. 밀월(蜜月)의 상대어로 내가 만든 단어다. 어휘에서 눈치 채듯 부부 사이를 나타낼 때 자주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늘과 땅은 곧잘 부부로 비유되기도 하고, 까마득한 옛날에는 한 몸이었다고도 한다. 고대에는 하늘과 땅이 사이가 좋으면 비가 알맞게 내리고, 냉전이 지속되면 가뭄이 든다고 믿었다고 한다. 가뭄과 홍수는 인류의 오래된 골칫거리였다. 오죽하면 물 관리를 지도자의 큰 의무 중에 하나로 여기고 가뭄이 심하면 그걸 지도자의 부덕(不德)이라고 했을까.
투두둑, 투두둑 비가 쏟아진다. 천지가 어두워지고 천둥소리가 은은히 울린다. 적지 않은 비가 내리려나보다. 몇 달을 비다운 비가 내리지 않아 전국이 가뭄으로 고생을 하면서 인사조차 “비가 좀 와야겠어요.”였는데 얼마 전 내린 비에 이번에는 여기저기서 비 피해를 겪었다. 아직 강우량이 부족해 가뭄해갈을 위해서는 온 것보다 더 많은 비가 내려야 한단다.
퍼붓는 비는 이웃집 양철지붕을 사정없이 때려댄다. 모처럼 비에 젖은 흙냄새가 집안으로 들어오고 좁은 뒤뜰에 빗물이 흘러간다. 시원하고 상쾌하다. 창 너머 대나무와 나팔꽃, 상추와 편백나무가 제 세상을 만난 듯 온 몸을 흔들며 신나게 춤을 춘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하지 마라, 맞은 사람은 다리 펴고 자고 때린 사람은 오그리고 잔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참는 게 미덕이다” 부모님께 숱하게 들어온 말이다. 돌이켜보면 내게 그리 필요한 말들은 아니었던 듯하다. 힘없고 내성적인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함부로 나서지 않음을 잘하는 것으로 알았으니 자연히 소극적이 되어 조용하고 말 잘 듣는 존재감 없는 아이가 되었다. 먼저 남에게 다가가기는커녕 다가오는 이들도 피해야 하는 줄 알았다. 문제가 없다는 것은 부딪치지 않음이다. 언제나 사건의 중심부에서 한두 걸음 물러나 있었다. 세월이 가도 부딪치고 섞임이 없으니 특별한 관계가 생길 리도 없었다. 싫어하는 이도 없고 좋아하는 이도 없는 무색무취의 존재가 되어갔다.
마치 구름 없음, 맑음, 화창함의 나날들이 지속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길은 가뭄으로 가는 길이었다. 가뭄 속에 사는 게 얼마나 팍팍하고 힘 겨운가. 내 삶에 스스로 크게 도전하고 실패했던 경험이 없다. 그걸 뒤집으면 그만한 성취와 결실이 없었다는 말이다.
화창한 날이 언제나 좋을 수는 없다. 구름 끼고 비가 내리는 날이 햇볕 쨍쨍 쬐는 날보다 반가운 경우도 있다. 청년기에는 실패나 시행착오가 치명적이지 않다. 약간은 무모한 도전으로 성공을 못해도 괜찮다는 거다. 도전과 용기가 무엇인가. 한두 걸음 물러서서 눈치만 볼 것이 아니라 부딪쳐보는 거다. 먼저 다가가고 내게 오는 이들을 피하지 않고 부딪치는 거다. 남에게 유익함을 주려해도 손해를 끼치는 수가 있으리라. 참는 게 미덕이 아니라 불편하면 분명하게 표현해야 서로 알고 고칠 수 있다.
밀월의 시기는 서로 주고받는 때다. 한 쪽은 주기만 하고 다른 이는 받기만 하면 그 관계는 바람직하지 못하고 오래 갈 수도 없다. 톱니바퀴처럼 서로 들고 남이 맞물려야 효과적으로 힘을 쓸 수 있다. 상대와 만나 부딪치고 사랑과 아픔을 주고받는 것이다. 한자어(漢字語)처럼 집안[⼧]에 반드시[必] 벌레[⾍]가 있어야 꿀[蜜]을 얻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손이 많이 가고 번거롭지만 꿀을 얻으려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이들은 안 해도 되는 일들을 만들어 계획을 세우고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일부러 문제와 위기를 만들어 해결하면서 자신들의 힘을 기른다.
서로 부딪침이 없고 만남이 없는 공허한 세월을 나는 공월(空月)이라 했다. 그런 상황은 영겁(永劫)의 시간이 흐른다 해도 진전이 아닌 퇴보만 할 뿐이다. 하늘이 햇빛을 비추면 땅에 그림자가 나타나고 구름이 모여 비가 내리면 땅이 받아 흙속에 품어 생명을 살리는 호응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저수지를 파고 지하수를 길어내는 노력으로 하늘만 의지하지 않고 자구책(自救策)을 찾는 땅의 모습이라도 보여주어야 한다.
땅과 하늘의 지루한 냉전이 끝나고 땅을 향한 하늘의 분노(忿怒)도 애달픔과 그리움이 되어 흙먼지를 튀기던 기세가 가라앉고 사랑의 노래처럼 빗소리가 부드러워졌다. 하늘의 애무에 땅은 더욱 부드러워져 품었던 영양을 가지에 공급해 잎들이 싱싱해지고 더 크고 신실한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
내가 걱정이다. 부족한 면을 알았지만 고치기가 쉽지 않으리라. 긴 세월 굳어진 삶의 자세가 얼마나 내게 저항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라도 공허한 세월과 헤어져 밀월의 시기로 가는 거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보다 먹구름 모여들고 비 내리는 날이 더 좋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푸르고 향기로운 시절을 향해 가는 거리라. 부딪치고 울고 웃고 기쁨과 아픔을 주고받는 밀월의 기간을 살아보자고 자신과 새롭게 다짐한다.
하늘과 땅의 밀월을 들려주는 빗소리가 더 정겨워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