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활

비행기 고문

변두리1 2017. 2. 12. 15:28

비행기 고문

 

   벌서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은 데, 아직도 여섯 시간을 더 가야 한단다. 딸이 많으면 비행기를 자주 탄다고 했지만 내 경험은 30여 년 전에 제주도 한 번 간 것이 고작이었다. 아이들이 더 늦기 전에 가족여행을 가보자고 성화여서 여권을 냈다. 아내는 전혀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었다. 비행기 탔다가 멀미를 하면 내릴 수도 없고 큰일이니 시험을 한번 해보기로 하고 오후에 갔다가 이튿날 오전에 돌아오는 그야말로 시승을 해보았다. 짧은 시간 비행기는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인천서 파리까지는 청주에서 제주와는 사뭇 달랐다. 기차나 버스를 타도 열두 시간은 견디기에 만만한 시간이 아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오른 에어프랑스는 너무 벅찼다. 바깥 경치를 구경하는 것도 잠깐이지, 고도가 만 미터가 넘으니 아래가 보이지 않고 창가 자리가 아니니 욕심을 낼 수도 없다. 어딘가 바다 위를 지나는 것 같은데 그 이상의 정보는 찾기가 어렵다. 잠을 자려하니 정신이 더 말짱해지는 듯 하고 의자 앞의 영상을 보려 해도 다른 이들 것은 화려 찬란한데 내 것은 조작이 서투르니 쉽지 않다. 스크린에 뜨는 남은 비행시간과 거리만 자주 보게 된다.

   시간을 보내려 책을 읽다 긴 시간이 지난듯해 화면을 보면 5분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여섯 시간여 지난 것이 신기하다. 옆자리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호주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데 학교를 마치려 한국에 나왔단다. 호주가 얼마나 살만한가를 열심히 이야기한다. 그래도 외로움은 어쩔 수 없어 고국이 그리울 때가 많다고 했다. 사회보장이 잘 되어있고 경쟁이 심하지 않아 결혼하면 자녀들도 호주에서 살도록 권하고 싶단다. 청년과의 대화를 마쳐도 10여 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이 시속 1000km 전후로 쉭쉭거리며   날아가도 거리가 좁혀지는 것 같지 않고 영상 속 비행기는 늘 제자리에 멈춰있는 듯하다.

   비행시간이 길다 보니 참는데 한계가 있어 작은 일을 보러 갔다. 비행기 뒷부분이다. 생전 흔들리는 곳에서 일을 본 경험이 없어서인지 내 몸이 너무 예민한 탓인지 어렵다. 게다가 내가 하늘 높이 떠있다는 생각을 하니 두렵다. 창문을 열거나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비행기는 감옥이다. 무턱대고 버틸 수밖에 없는 이 난처한 상황을 어찌해야 하는가. 자리에 돌아와서도 비행기의 흔들림을 느끼며 내 몸이 그저 잘 견뎌주기만을 바랄뿐이다. 느릿느릿 이지만 시간은 흐르고 이제 네 시간 가량이 남았음을 확인한다. 그런대로 견디던 아내는 어느 순간부터 창문에 머리를 박고 있다. 아무런 준비 없이 타기만하면 목적지까지 가는 줄 알았으니 무경험자들의 용감함이 빚은 큰 사건인 셈이다.

   승무원들은 수시로 통로를 돌며 먹을 것을 가져다준다. 편한 것이 애플주스니 그것 한 가지만 요청한다. 별다른 움직임 없이 자리에 앉아 있자니 더부룩해 식사는 할 수 없다. 많은 이들이 비행기 승무원을 선망하지만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일상이 되면 익숙해진다지만 나라면 못하겠다. 대단하다. 하늘에 떠서 그 오랜 시간을 어떻게 살아낼까. 일제는 독립투사들에게 비행기고문을 했다. 지상에서 온몸이 떠있다는 것과 그들의 폭력에 저항할 수 없음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잔인한 그놈들은 사람을 공중에 매달아놓고 태연히 농담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일상의 일과를 행했을 것이다. 세계를 무대로 일하는 이들은 지구촌을 안방처럼 자기 마당처럼 다닌다는데 나는 그런 인물이 될 기질이 없나 보다. 겨우 한번 타는 것이 이렇게 힘겨우니 알아볼만하다.

   나 혼자만 예민하게 느끼는 것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기내 공기가 탁해지는 것 같다. 음식냄새와 승객들의 호흡과 생리적인 가스배출로 혼탁해졌을 게다. 때때로 고도를 높이고 낮출 때와 좌우로 흔들리는 순간을 견디기가 수월치 않다. 나와 아내외의 승객들은 너무도 태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누가 정상인 것인지 모르겠다.

   마침내 착륙을 위해 안전벨트를 착용하라는 안내 방송이 흐른다. 아직도 30분 넘게 남았다고 화면은 보여주지만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이 고문의 끝이 보이는 것이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창문에 머리를 박고 있던 아내가 끝내 버티지 못하고 뛰어나간다. 승무원들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하는데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구토를 하고 난후 아내는 심란한 얼굴이다.

   

  이제 착륙이다. 비행기바퀴가 땅에 닿는 것을 느낀다. 땅이 반갑고 긴 시간 안전하게 비행을 해준 조종사와 승무원들이 고맙다. 지친 몸으로 파리에 내리니, 정오쯤 인천을 떠나 열두 시간을 날아왔는데 오후 네 시가 조금 넘었을 뿐이다. 한국과 여덟 시간 시차가 실감난다. 다시 수속을 하고 또 비행기를 탄단다. 두 시간 남짓 걸리는 바르셀로나가 오늘의 최종 목적지다. 여행 초반부터 이렇게 지치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다. 다른 수가 없으니 한 번 더 고문을 당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