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심환 한 병
청심환 한 병
회사로 출발한지 30분이 채 되지 않아 첫째가 전화를 했다. 앞차를 받았단다. 사람이 다쳤는지 물으니 아니란다. 그러면 별 거 아니라고 보험사에 연락하면 다 알아서 해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와주기를 바라는 눈치가 역력했지만 다른 해야 할 일이 있어 못 간다고 했다. 기대감을 가지고 의지하고 싶었을 것이 느껴져 일을 미루고 현장에 가보았다. 보험사 직원이 나와 있다가 별 사고가 아니라고 안심을 시킨다.
출근길에 바쁘게 가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앞차가 급정거를 했단다. 차간거리가 짧아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앞차를 받아 번호판이 조금 쭈그러진 모양이다. 이미 상대차도 떠나고 경찰도 자리를 뜨고 없었다. 얼굴이 얼고 조금은 추워 보인다. 누구나 작은 사고들을 겪으며 운전이 익숙해지는 거니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위로하며 출근을 독려했다.
운전을 하면서 크고 작은 사고를 한 번도 겪지 않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나도 인사사고는 없었지만 여러 번 접촉사고를 냈다. 그때마다 당황스러웠다. 돌이켜 생각하면 아찔한 순간들이 많았다. 그런 일을 겪고 나서는 차타기가 싫었고 두렵기도 했다. 한 번은 겨울로 접어든 때에 성도의 가정을 방문했는데 그 집에 머무는 동안에 비가 내리고 기온이 내려가 도로가 얼었다. 지대가 높은 곳이어서 내려오는 길이었는데 내가 운전하는 방향과 관계없이 차가 가고 있었다. 경험이 많지 않은 때여서 진행방향과 반대로 핸들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차는 담을 향해 미끄러져 가고 반대편으로 운전대를 돌리니 높이차가 이번에는 차가 비탈로 향한다. 그 비탈 아래는 허름한 집들이 여러 채 있었다. 자칫하면 그 지붕위로 차가 떨어질 판이었다. 함께 동승한 이들은 그 순간의 위험을 잘 몰랐을 게다. 그 위험한 순간을 간신히 모면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2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모골이 송연하다는 말을 그럴 때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연 약국이 없었다. 청심환을 사먹으라고 했지만 그냥 지낼 것이 뻔했다. 아내와 집으로 돌아오다 다시 첫째의 회사가 있는 곳으로 갔다. 내둥 오지 않던 눈이 내리고 안개가 자욱이 꼈다. 낮이지만 쾌활한 느낌이 없고 침침할 뿐이다. 미호천다리를 지날 때에는 안개가 스멀스멀 달려들었다. 출근 차량들이 밀리면서도 다들 바쁘게 달리고 있다. 평소와 달리 시야가 좁으니 당황스럽다. 어디에서 좌회전을 해야 하는지 미리 알 수가 없다. 앞일을 알 수 없는 게 사람 일이라더니 오늘 날씨가 그 짝이다. 간신히 길을 찾아 약국을 확인했다. 역시 시간이 일러 문을 열지 않았다.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익숙지 않으니 바쁜 출근시간에 어디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다. 다시 와 보니 약국내부가 환하다. 아내가 들어가 마시는 청심환을 샀다. 회사 근처에서 전화를 하니 첫째가 손을 흔들며 나온다. 약을 건네고 회사를 휘돌아 집으로 오며 생각했다. 첫째는 정말로 그다지 놀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또 청심환의 효과가 미미할 수도 있다. 그것보다는 우리가 자신을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훨씬 마음 따듯하고 힘이 될 게다. 아마도 그것이 더 효과가 있을 듯하다.
아침 시간이 꽤 지나가는데 아직도 날은 환히 개이지 않는다. 게으른 이들에게 눈이 왔음을 알리려 하는지 길가 상록수 가지와 잎에 눈이 소복하다. 자주 볼 수 없던 설경에 어린 시절로 달려간 내 마음에는 코끝 시린 바람이 불고 찬 고무신을 신고 한적한 흙길을 가는 소년이 있다. 그 추웠던 겨울엔 한 겨울 내내 흰 눈이 쌓였고 개울이 얼고 처마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렸었다. 시내로 접어드니 길은 산뜻하고 눈을 볼 수가 없다.
예상치 못한 일로 긴 아침을 보냈다. 어찌 인생이 생각한 대로만 흘러갈 수 있으랴. 그럴 수 있다고 한들 그보다 따분한 일이 있을까. 때로는 뜻밖의 일들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거나 더없이 기쁘게 해주기도 한다. 그런 일들은 아이들을 성숙케 하고 어른들을 겸손하게 한다.
주변을 돌아보면 평소 운전을 잘 한다고 자신하는 이들이 사고를 낸다. 그들은 속도를 내고 앞지르기, 차선변경을 멋지게 하고 어디에 속도측정기가 있는지를 잘 안다. 하기는 요즘은 내비게이션 아가씨가 모든 것을 지나치리만큼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자만심은 늘 우리의 경계를 늦추게 한다. 운전을 하다 가끔 접촉사고가 나듯이 인생에도 원치 않는 일단정지 신호가 들어올 때가 있다. 자신의 일정은 쉴 틈이 없는데 휴식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 갑자기 찾아온 사고나 질병 가볍게는 감기 같은 것들이다. 어떤 때에는 그것들이 더 큰 어려움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고속도로에도 쉼터가 있고 군인들은 행군 중에 잠깐씩 휴식을 취한다. 길게 보면 그런 것들이 훨씬 유익하다.
일기예보는 내일 내륙지방에 더 많은 눈이 내린단다. 눈 속에 운전하는 일은 마음 졸이는 일이다. 오늘 아침 일이 첫째와 나에게 올 겨울 눈길 운전을 조심조심 잘 하라는 예방주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쩌다 연 서랍에 동그랗게 포장된 청심환 서너 개가 얌전히 누워있다. 오늘 같은 일로는 그것들을 쓸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