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손
당신의 손
글을 쓴 한상숙은 제천 출신으로 청주교대를 나와 33년을 교육계에서 근속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글의 내용도 반듯하다. 악한 등장인물이 없고 아버지나 어머니의 이름도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다. 가부장적이고 유교적인 교육공무원 아버지, 온갖 험한 일을 하면서도 장애가 있는 은남이를 수술해 주려는 일념으로 사는 듯한 어머니, 한없이 착하고 공부 잘하는 주인공을 위시한 네 아이들.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어떻게 가족애로 해결해 나가는 가하는 것이 줄거리의 중심을 이루는 듯하다. 그 당시의 생활상과 정과 문화를 들여다보는 재미를 주는 세심한 묘사가 빼어나다.
주인공 은이가 보는 가정의 어려움은 유교적 가족관계에서 오는 ‘맏이’역할을 아버지가 해내야 한다는 데 있다. 교육계에서 교감과 장학사라는 위치가 한 가정을 꾸리기에 그렇게 힘든 지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부모님들과 동생들 그리고 가까운 친척까지 챙기기에는 무리일 게다. 그러니 엄마가 험한 일들을 놓을 수 없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지속적인 힘겨운 지원이 그들로 우리 집을 의존하게 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엄마를 자발적으로 더 힘들게 한 것은 ‘은남이의 장애’였다. 딸로 태어난 것도 힘겨웠지만 ‘언청이’여서 더 몸과 마음이 힘들었다. 주변의 시선도 힘들지만 반드시 고쳐주겠다는 의지에서 엄마는 억척으로 돈을 모은다. 그 간절함으로 생명을 잃은 줄 알았던 새끼돼지들을 살려내는 장면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어머니의 그런 사랑으로 모두는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갖게 되는가 보다. 두 번째의 수술을 위해 모았던 돈을 둘째 작은 아버지에게 넘겨주는 장면에서는 분노가 일기도 했다. 은남이의 장애 때문에 미국으로의 입양얘기도 있었고, 또래들로부터의 놀림과 의연한 대처를 엿보기도 했다. 은남이는 씩씩하게 성장했다.
가족의 끈끈한 사랑도 글을 끌어가는 힘이었다. 자녀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희생은 거룩하다. 네 자녀가 한두 푼씩 모은 저금통을 깨뜨려 엄마의 내의를 사라는 것이나 그것을 차마 못 사고 ‘우리말 큰 사전’을 사오는 엄마에게서 서로를 향한 지극함을 본다. 친구로 인해 밝혀진 혈연관계가 아닌 것도 걸림돌이 될 수는 없었다.
죽음과 이별의 아픔도 여러 번 반복되고 있다. 의식도 하지 못한 채 은이는 어머니의 죽음을 겪는다. 친구 주희를 통해 듣게 된 친구 엄마의 죽음과 가슴 아픈 이별, 한 겨울 태어나서 곧 죽음을 맞은 새끼돼지들과 가족 같았던 새 딱따구리의 죽음, 그리고 그 새를 주었던 섭이의 장마 속에서의 죽음. 죽음과 이별은 성장의 한 과정이다. 살아있고 관계를 맺은 이들은 언젠가 죽고 그 관계가 풀리는 때가 온다. 그것은 슬픔이지만 그로 인해 한 뼘씩 생각이 커간다.
남녀 관계는 어디서나 생겨나고 서로에게 큰 기쁨과 상처가 되고 주변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가장 강력한 인간관계 중 하나다. 친구 주희의 엄마는 후처다. 하지만 아들을 낳지 못한 노인과의 사이에 딸인 주희 밖에 두지 못한다. 문제는 양아들과 주희 엄마사이에 생겼다. 그로인해 주희 엄마는 그 관계가 온 마을에 공개되어 망신과 폭력을 당하고 콩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아버지도 남녀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가정의 경제문제와 은남이로 인한 아픔 그리고 크게 달라질 것이 없는 미래와 일상에 예전의 임 선생이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 지펴진 불꽃이 점점 커져 일을 낸 게다. 엄마가 병이 나고 가정이 풍파를 겪은 후에야 일상으로 돌아왔다.
자녀들을 향한 전통적 시선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들이 부모를 기쁘게 하고 가정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학교생활을 잘하고 공부에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다. 사남매가 밝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몫을 해내고 있다. 은이가 동화구연에서 대단한 재능을 보이고, 은남이는 글 쓰는 재주가 비상하다. 취학 전에도 동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더니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 유네스코 아동문학에 당선을 한다. 게다가 삼남매가 학업에서도 모두 일등을 한다. 드러내놓고 자랑하지는 못해도 엄마는 그것이 더 없는 자부심이다. 어쩌면 지금도 큰 변화가 없는지 모르지만 시대상을 읽는 것 같기도 하다. 은남이가 두 번째 수술을 받으러 가고 은이는 할머니에게 엄마의 진실을 듣고, 중요한 일을 혼자서 판단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며 소설은 끝이 난다. 소설 속 가족들에게 이후로는 좋은 일들이 연달아 생기면 좋겠다.
한상숙 소설가의 첫 작품인가 보다. 작가들이 초창기에는 대개 자신과 주변사를 쓰지 않을까. 이 이야기들도 작가가 겪었거나 주변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는 아닐까. 가족과 그 삶은 시대와 무관한 영원한 소재다. 그 시대에 녹아든 예상 밖의 고단하고 힘겨운 가족이야기면서 성장소설을 통해 아련한 간접경험을 한 느낌이다. 소설가가 벌써 적지 않은 나아임을 알 수 있지만 그 분의 또 다른 작품을 읽고 싶다는 욕망이 솟는다.
인생의 숙성된 맛도 좋지만 치열한 갈등과 욕망들이 부딪히는 “째앵”소리 나는 작품이면서 세밀한 묘사와 문장력과 구성을 보여주는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 아마 작가도 그런 작품을 절실하게 쓰고 싶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