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꽃과 비
과꽃과 비
오래 기다렸더니 뒤뜰에 과꽃이 피어나고 있다. 어려서는 어느 것이 과꽃인지 구분도 되지 않더니 봉오리 맺히고 꽃망울 터지니 알 수 있었다. 아침에 눈뜨면 먼저 그곳을 보았다. 몇 송이 꽃이 더 피어났나, 이전 꽃들은 얼마나 더 벌고 있는가. 며칠 전 밤새 적지 않은 비가 번개와 함께 몰아쳤다. 한동안 내리지 않아서 반가웠다. 연일 계속되던 열대야도 물리쳐 줄 것 같았다. 밤새 내리다 그치다 하는 비를 상쾌한 마음으로 반겼다. 여러모로 고마운 단비였다.
허나 뒤뜰을 보니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큰 비에 논과 밭이 망가지듯 그렇게 허망하고 어지러운 모습이 되어 있었다. 가늘어도 나무들은 견뎌냈지만 튼튼해 보이던 풀들조차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일으켜 세우려 해도 별 방법이 없어 보인다. 마음이 아프고 걱정스럽다. 분주하게 하루의 일과가 펼쳐지니 과꽃을 잊고 살았다.
밤이 지나고 새벽녘 밝은 햇살에 바라본 뒤뜰은 뜻밖의 모습이었다. 하루가 지났음인지 그 작은 꽃봉오리들이 줄기가 굽어진 채로 하늘을 향하여 일어서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꿋꿋이 버티고 버티다 넘어진 그들이 넘어진 채로 다시 강인한 생명력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누구를 향한 원망도 다른 이들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 나가는 것이다.
깊은 산속에 찾는 이 없는 풀꽃들도 그런 굴하지 않는 생명력으로 강인하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혼자서 쓰러지고 일어나고 꽃피우고 향기를 날리고 열매 맺고 씨를 또 퍼트리며 같은 삶을 되풀이 하며 그러려니 하고 한해 한해를 이어오고 있을 게다.
그 난리를 치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늘 향해 솟아오르는 과꽃 옆으로 백일홍 채송화 나팔꽃들도 다르지 않았다.
목타하던 농작물들에게 생기를 주고 지친 이들에게 시원함을 끼친 단비도 모두에게 좋을 수가 없음이 애석하다. 그들에게 마음이 있다면 허공으로부터 먼 거리를 기쁜 마음으로 한달음에 내달아 왔으리라. 서로 기약도 없고 알지 못해도 한 편은 먼 거리를 달려오고 다른 편이 상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면 얼마나 좋은 만남인가. 그런데 그 만남에서 기다리던 이들이 큰 어려움을 겪는다면 이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또 있을까.
힘을 갖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나는 힘이 없어서, 무력해서 위기를 넘긴 적이 여러 번 있다. 30여 년 전의 일이다. 시험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한 수업시간에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자습하지”라고 혼잣말을 했다. 내 말을 잘못들은 교사는 자신의 열등감에 근거해 ‘재수 없다’라고 알아듣고는 갑자기 “재수 없다”고 말한 녀석 나오라고 난리를 쳤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니 나갈 리 없고, 우리 줄부터 그는 매타작을 시작했다. 한 바퀴를 돌아 모두가 매를 맞아도 나오지 않자, 다시 우리 줄을 나오라고 해서 때렸다. 나중에는 나를 빤히 노려보며 얘기했고 나를 계속 팼다. 지금도 그 교사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문제라면 나를 집중적으로 추궁해야 했고, 자신이 오해였으면 사과하면 될 일이었다.
상황이 악화되고 내가 참아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섰을 때, 내게 힘이 있었다면 사고를 쳤을 것이다. 다음이야 어찌되든 웃통을 벗어 제치고 그와 한판 붙었을 것이고 학교를 무사히 마치지 못했을 것이다. 통제할 능력이 없으면 차라리 힘이 없는 것이 다행스런 일일 게다.
큰 비가 내렸다고 해서 비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빗방울이 점차 몸피를 불리며 힘이 더해질 때, 그들에게 감정이 있다면 얼마나 신이 났을까.
우리 사회에서 어떤 모임이건 덩치가 곧 힘이다. 같은 이념, 처지와 관심을 공유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목소리와 지분이 커진다는 의미다. 규모가 커지면 조직을 확장하고 유능한 이들을 선발해 지도자로 세우고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 하지만 내가 그러한 지도력의 정점에 있다면, 그런 현상을 위험신호로 알고 규모를 줄이는 데 힘을 쏟을 것이다. 몸피가 커지면 관심이 집중되고 세간의 중앙에 자리할 수밖에 없다. 그때에 준비가 철저하지 못하면 양극단으로 치우쳐 일을 그르치게 된다.
풍광이 좋다고 알려지면 그곳이 얼마가지 못해 망가지고 난개발(亂開發)을 피하기 어렵다고 한다. 관공서나 군부대 종합버스정류장이 들어서는 곳에는 시장이 생기고 사람들이 모여 자연이 파괴되고 번화가가 만들어진다.
작고 약한 것이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오래갈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 패배의식에 찌든 편협한 견해라고 할지 모른다. 힘이 있으면 혼자 누리고 싶고 휘두르고 파괴하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오히려 약하면 스스로의 힘으로 서려하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고, 서로 도움을 주고 의지하려 한다.
세차고 많은 양이 짧은 시간에 뒤뜰의 과꽃에 쏟아지는 것보다는 약하고 적은 비가 수차례 조금씩 내리는 것이 훨씬 좋은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