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잘 한 일일까
그게 잘 한 일일까
달포쯤 전 일이다. 식탁 옆으로 난 유리문으로 뒤뜰의 모습을 보니 화분에 심어 놓은 백일홍 꽃 핀 가지가 나팔꽃에 의해 꺾여 있었다. 나팔꽃의 덩굴손이 또 일을 낸 거다. 그 놀라운 생명력이 한 낮에도 중력의 법칙을 어기고 하늘로 치솟더니 옆의 백일홍을 무지막지하게 감고 올라가 땅을 향해 고개 숙이게 했다. 강자의 횡포 같았다. 달려가 전지가위로 나팔꽃 줄기를 잘랐다. 빽빽하던 것들이 듬성듬성해 보일만큼 잘라내고 백일홍에 버팀대를 대주고 테이프로 감아서 일으켜 세웠다.
후련하다. 악의 세력을 응징한 정의의 사도라도 된 기분이다. 이런 일을 내 생각대로 할 수 있으니 상쾌하다. 며칠이 지나 화분을 보니 끝내 그 백일홍은 생기를 잃고 죽고, 맞은편 다른 줄기에서 꽃이 피어오르고 있다. 나팔꽃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화분을 채우는 중이었다. 아이들 놀이에 어른이 끼어든 느낌이었다. 그렇게 수선을 떨지 않아도 그들이 어련히 알아서 적응하고 별 탈 없이 지나갈 일을, 스스로 흥분해서 애매한 생명을 괴롭힌 것 같다. 어릴 적 어머니는 텃밭에서 어린 배추를 솎아 준다하시며 덜자란 배추들을 뽑곤 하셨다. 그런 날 저녁에는 배추 국을 먹었었다. 왜 그때는 아무 저항감이 없었을까. 심지어 맛있게 그 국을 먹었을까. 그 때보다 내가 더 인격적으로 성숙해 진 것일까 아니면 자연 사랑이 깊어진 것인가. 그 때의 어머니 행동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배추는 처음부터 용도가 식용이었고 더 성장한다 해도 결국 식탁에 오르는 운명이었다. 배추에게도 그것이 존재 목적을 이루는 것이요 자신의 가치를 최선으로 높이는 것 일게다. 사람과 벌레에게 먹이로 제공되는 것이 그들의 삶이다. 뒤뜰의 백일홍과 나팔꽃은 그 효용가치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주는데 있다. 생명의 조금 길고 짧음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사는 동안 자신들의 본성에 충실하게 살아갈 뿐이니 잘잘못을 가린다는 것이 내 착각일 뿐 부질없는 일이다.
이 아침에 바라보니 지난 번 내린 비에 웃자란 그들이 이리저리 쓰러져 땅으로 향해 있다. 어떤 것들은 굽은 채로 다시 햇빛을 향해 몸을 틀어 하늘 향해 꽃을 피우고 있다. 자연의 원리를 좇아 그들의 삶을 열심히 사는 것이다. 주변에 흩어진 채로 과꽃, 맨드라미, 봉숭아, 채송화가 편안히 자리하고 있다. 내 생각을 바꾸니 그들이 어색하거나 불편해 보이지 않는다.
가끔은 힘센 동물이 약한 짐승을 잡아먹는 영상을 보게 된다. 죽어가는 생명들이 불쌍하지만 맹수들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먹이를 취하는 것이며 삶의 법칙에 따르는 것뿐이다. 외래 어종이나 식물들이 우리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교란시킨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인간들의 잘못이다. 황소개구리, 배스 같은 어류와 가시 박 같은 식물들인데, 마치 우리 산하를 망치는 원흉처럼 그들을 바라보지만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을까. 그들을 들여온 인간들이 문제이지 가진바 본능대로 생명을 이어가는 동식물들에게 무어라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황폐해져가는 우리 생태계를 뒷짐 지고 방관할 수만은 없으니 이제라도 그들을 제거하고 우리 것을 더 살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문제는 사람들이다. 자연계에서 가장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오만과 편견에 젖어 있는 인간들이다. 본능과 충동을 벗어나는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존재는 이 땅에 인간이 유일하다. 그 특권으로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해 온 것이 인간의 역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서로를 해치고 죽이는 전쟁무기를 개발하는데 온 힘을 쏟아 온 듯하다. 자신의 육체적 힘으로부터 돌과 활과 칼을 거쳐 총과 대포와 미사일과 핵무기에 이르기까지 무기의 개발은 끊이지 않았고, 그 부산물로 이룩한 생활용품의 발전도 적지 않았다.
전쟁은 각 집단의 이해가 충돌하고 그것을 대화로 해결할 수 없을 때 벌어진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강자의 과도한 욕망과 그를 충족하기 위한 도덕성이 결여된 폭력이 전쟁이라는 것이다. 크게 부족한 약자가 선의로 전쟁을 일으켜서 물의를 빚은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논리적으로도 모순일 뿐이다. 주도권은 늘 강자가 쥐고 있으면서 끝없이 약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압박을 가한다. 강자가 마음을 비우고 전쟁을 포기하면 이 땅이 좀 더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나팔꽃을 향해 횡포를 휘두른 것도 내가 강자의 위치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흉측한 곤충이나 내게 해를 끼칠지도 모르는 맹독성 식물이었다면 그렇게 함부로 할 수 있었을까. 다른 것들을 비난하고 함부로 대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아 자연과 사람들에게 해로운 일을 금할 일이다. 오만과 편견을 버리고 함께 어울려 살아갈 궁리를 해야지. 사람들뿐 아니라 이 땅의 동식물들과 함께. 이제야 그때 내가 한 일이 잘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