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흉터
아름다운 흉터
-손때 묻은 이야기-
글쓴이 이청준은 1939년 전남 장흥에서 나서 〈서편제〉, 〈선학동 나그네〉, 〈당신들의 천국〉등 많은 작품을 남기고 2008년 작고한 소설가다. 그는 이 수필 류의 글을 통해 주로 고향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일찍 생을 마감한 형, 초등학교 시절의 선생님에 대한 추억과 운동회 가을 소풍, 형이 남긴 최대의 선물 책, 고향에 대한 생각들과 그곳의 인간적인 사람들을 기억해 낸다. 당시의 아픔이었던 상처들이 부끄러움이 되고 또 다시 아름다운 추억이 된 것을 회상해 낸다. 어쩌면 오래 전부터 시골 추억을 간직한 아이들은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글쓴이와 비슷한 시골의 삶을 체험한 마지막 세대가 오늘날의 4-50대 일 것 같다. 70년대 들면서 강풍처럼 몰아친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과 아파트의 열풍으로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고 시골에는 노인들만 남았다. 자녀들의 교육문제와 부모의 직장을 볼모로 젊은이들이 도시에 터를 잡으니 아이들은 시골이 삶의 터전이 될 수 없다. 어쩌다 주말에나 혹은 현장체험으로 방문하는 시골에서는 그 진면목을 볼 수 없다. 그곳을 삶의 근거로 하는 시골과 며칠 머물다 떠나는 시골이 같게 느껴질 수는 없다. 6-70년대의 공동체가 살아있고 아이들이 그득했던 그곳을 오늘의 모습으로는 느낄 수 없다.
오늘날의 아이들에게 책이란 무엇일까. 영상매체와 전자기기의 발달로 아이들이 강한 자극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영상과 음향에 길들여진 이들에게 종이에 인쇄된 책의 매력이 얼마나 될까? 읽을거리가 귀해서 식품과 약품의 설명서까지도 읽어가던 그 시절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다. 어린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휴대폰에 눈을 붙이고 걸어간다. 성인들의 휴대폰도 수시로 새 메시지가 왔음을 알린다. 별 알맹이 없는 의사소통에 목말라한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온전하지 못한 이들이 마을에 여럿 있었다. 우리 마을에도 “킹킹이”와 “오뚝이”라 불리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수시로 “킁킁”거리고 길을 가다 “우뚝 우뚝”서곤 했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아이들은 그들을 보면 큰 소리로 부르고 흉내 내면서 놀려댔었다.
요즘은 초등학교의 운동회나 소풍이 너무 싱거운 것 같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모두 끝이 난다. 계획에 따라 실시하는 연례행사처럼 되어가는 것 같아 허전하다. 운동회를 앞두고는 뙤약볕에 한 달여 연습을 했었던 것 같다. 그 날은 많은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찾아와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즐기는 축제의 날이었다. 모처럼 운동장이 왁자지껄하고 하늘이 만국기로 꽉 차고 솜사탕과 장난감 등의 장사치들이 몰려들어 장이 서는 흥겨운 날이었다. 의미도 제대로 모르면서 파월부대의 군가를 부르며 기마전을 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해마다 어느 학교고 대동소이(大同小異)했을 경기 종목과 발표에 싫증이 났을만한데도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나는 그 시절 시장에 관한 기억이 생생하다. 지은이는 시장의 단골손님이던 약장수를 궁핍했던 시대의 동화로 서로 알면서 속아주던 추억이라고 소개한다. 우리 아버지는 장이 서는 곳을 찾아다니며 한두 마리 닭을 사서 팔던 닭 장수였다. 그래서 청주장이 서는 2일 7일이 되면 학교가 파하고 자주 장으로 달려가곤 했다. 먼저는 장터를 돌며 아버지를 찾는다. 그곳이 내 근거지가 되기 때문이다. 몇 번 가보니 그곳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그곳에서 서로를 확인하고 아버지께 일이 있으면 나를 그곳에 두고 자리를 비우시고 별 말이 없으시면 내가 눈치를 보아 빠져나와 장터를 한 바퀴 돌곤 했다. 철따라 등장하는 새로운 물건들, 물건 값을 깎으며 서로 옥신각신하는 모습이 재밌었다.
해가 저물고 어스름해지면 파장이 되곤 했다. 더러는 강아지와 닭들이 팔다가 남을 때가 있었다. 그들을 자전거에 싣고 집으로 오면 나는 그들과 놀곤 했었다. 대개가 그들과 2-3일을 놀고 정이 들 만하면 다시 내다 팔곤 하셨다. 아침에 학교가면서 헤어진 강아지가 학교에서 돌아와 있으면 반갑고 없으면 허전했다. 그 시절엔 혼자서 집에 있어야 하는 날들도 많았다. 심심할 땐 혼자 놀 수밖에 없었다. 그런 순간에 도움이 되던 것이 스피커였다. 하루 종일 혼자 떠드는 스피커. 그때 자주 나오던 것들이 ‘미스터 코리아’ ‘남궁동자’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김삿갓 북한방랑기’같은 것들이었다. 그래도 내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들이 있어 유년이 밋밋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저 너머의 세계, 고향을 떠나지 않은 내가 그곳들을 둘러보아도 기억속의 그곳들이 아니다. 도랑은 복개되어 넓은 길이 되었고 메뚜기 잡던 논에는 가게들 촘촘하고 뛰놀던 산에는 아파트들이 가득하다. 그 시절 함께 놀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 보물이던 구슬과 딱지가 사라져갔듯이 내 유년도 내 삶의 저편에서 가물거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