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하늘로 돌아가네
나 하늘로 돌아가네
-천상병 유고시집-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헌책을 샀다. 최소판매금액이 되지 않아 다른 책을 더 살 수밖에 없어서 판매목록을 일별하다가 이름이 익숙한 시인의 시집이 있어서 구매했다. 1993년에 출간된 책이니 무려 23년 전 책이다. 이런 책이 아직도 판매된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시인의 삶을 잘 알지는 못해도 그 분의 시 “귀천(歸天)”은 널리 알려져 있고,‘때 묻지 않은 삶을 살다간 기행을 보여준 천재시인’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값이 얼마인지도 모를 얇은 그 책을 읽으며 이 땅에 이토록 순수한 사람이 험한 세상을 살다가 그토록 고운 마음으로 하늘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깊은 산속의 아름다운 꽃잎에 맺힌 이슬 같았다.
1930년 일본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에 해방을 맞는다. 해방된 해에 귀국하여 현재의 중․고등학교 과정인 중학교를 마산에서 다닌다. 담임교사였던 김춘수에 의해 19세에 〈강물〉로, 《문예》지의 추천을 받는다. 한국전쟁에 미군통역관으로 6개월을 근무하고 전쟁 통의 부산에서 서울상대에 입학한다. 그는 몇몇 문우들과 동인지를 발간하고 평론활동을 겸하며 1952년 〈갈매기〉로 추천이 완료된다. 1954년에는 서울상대를 수료하고 외국서적을 번역하기도 했다. 1964년에는 나중에 서울시장이 되어 불도저시장이라 불렸던 초대 김현옥 부산시장의 공보비서로 2년여 간 재직하기도 한다.
1967년은 그의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그의 삶을 현격히 변모시킨다. 이른바 동백림 사건으로 북한에 다녀온 친구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약 6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그날의 사건을 후일에 “아이롱 밑 와이샤쓰같이 당한 그 날…”이라고 회고했다. 시인은 1971년 고문의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져 서울 시립정신병원에 행려병자로 입원을 당한다. 그가 갑자기 서울과 부산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사라져버리자 문우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새》라는 유고시집을 발간한다. 시인은 정신병원에서 극적으로 회복하여 돌아와 살아있는 시인의 유고시집이 발간되는 일화를 남기게 된다. 1972년 42세에 여덟 살 연하의 아내 목순옥과 결혼한다. 그녀는 시인의 대표작이 되는 〈귀천〉이라는 이름으로 카페를 운영하여 가정과 시인의 삶에 안정을 주게 된다. 이런 모습을 시인은 〈아내〉라는 시에서 “요새는 아내가 카페를 하는 통에 유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물론 아내 때문입니다.”라고 적고 있다. 1989년 8월 어느 날 쓴 일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쿨쿨 자는 아내의 백을 들고 와 살피니 육만 몇 천 원 있었다. 그 중에서 21,000원을 빼내서 밖으로 나왔다. …아내가 내가 21,000원 중에서 11,000원을 쓰고 10,000원 남은 것을 저축하라 한다고 손님들에게 말하니 가가대소한다.”시인은 직업을 “가난”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동료들에게 돈을 요구하며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살았다고 한다. 그래도 서울상대를 나온 엘리트가, 무엇이 시인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부산시장의 공보비서를 했을 때까지는 문학적인 면에도 대단한 재능을 가진 대단한 재원으로 대우받았을 것이다. 그의 중․고교 그리도 대학의 동료들 중에는 잘 나가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세속적인 길을 버리고 그로 탈속한 삶을 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큰 키와 도자기를 굽다가 실패한 듯한 얼굴, 높은 목소리와 깔깔대는 웃음소리, 거리낌이 없는 것 같은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의 생활. 어쩌면 불안과 질병 그리고 허약함, 자신에게 향하는 무수한 눈초리들에 대한 보란 듯한 따듯한 무시, 그들을 향한 애정, 그런 것들이 모아서 만들어낸 그만의 기행은 아니었을까. 세속적 삶을 포기함으로서 어린아이다운 순진무구함을 많은 이들에게 보여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시는 대부분 꾸밈이 없고 순수 담백하고 쉽다고 한다. 곧은 것이 힘을 쓸 수 있고 쉬운 것이 감동을 준다. 〈맥주송(麥酒頌)〉이라는 시에서 “20대, 30대, 45세까지는 소주만 마셔대고 47세 48세 때는 막걸리만 마시고 일체 음식물을 안 먹었더니 59세 말에는 내 배가 임산부처럼 퉁퉁 부어올라”라고 적고 있다. 그 59세 시절이 간경화증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하여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통고받지만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5년을 더 살았다.
시인은 집을 나서서 여섯 살짜리 꼬마에게 ‘요놈 요놈 요놈아’라고 하니 그 아이가 ‘아무 것도 안 사주면서 뭘’하더란다. 그래서 가게로 가 사탕 한 봉지 사줬더니 좋아했단다. 또 한 번은 동네아이에게 요놈, 요놈 했더니 그 아이도 환갑 나이의 시인에게 요놈, 요놈 하더라고 했다. 사람은 글과 소문으로 전해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너무도 다르다. 내가 어느 날 천상병 시인을 만났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친구들처럼 살갑게 대해줄 수 있었을까. 상식으로 보면 무례한 일이지만 탈속한 이들에게는 서로 통하는 행동이리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시인이 노래한 〈귀천〉의 마지막 소절이다. 이 땅에서 그토록 힘들게 살고도 그렇게 노래할 수 있다니, 나는 돌아가 무슨 말을 하여야 하나. 시인이여, 나중에 그곳에서 뵙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