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함께

죽음이란 무엇인가

변두리1 2016. 6. 20. 01:36

죽음이란 무엇인가

 

   셀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그런데 뭔가 개운치가 못하다. 철부지의 만용을 보는 것도 같고 조개껍데기로 바닷물을 측량해 보려는 치기 같기도 하다. 모르는 것은 그냥 모른다고 하고 미지의 영역으로 두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을까. 견강부회(牽强附會)로 무식의 향연을 보는 기분이다. 논의하는 많은 부분들이 그만한 의미가 있는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불가에 모여들어 몸부림치며 죽음으로 달려가는 불나방을 보는 듯하다. 죽음을 정의하고 분류하는 것도 전문가적인 연륜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한계를 넘지 못하는 답답함이 있다.

 

   누구도 죽음을 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는 없다. 종교인들도 전문가들도 개인적 확신만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영혼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하고 있다. 그 자신이 영혼을 인정하지 않으니 주로 반박이다. 그것은 인류의 존재이래로 오늘까지 명쾌하게 풀리지 않지만 또 그만큼이나 인류의 정신사에 큰 영향을 끼쳐온 주제이다. 인류사에 있어서 오랫동안 천동설을 지지해 왔고 쇳조각은 하늘을 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전거를 보지 않은 이는 두 바퀴로 달린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고 백 년 전만 해도 누가 무선 전화기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개인이 알고 있는 지식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인간에게서 선택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 누구도 도덕적 양심도, 행동에 대한 책임도 물을 수 없다. 법이 무의미해지고 개선의 여지는 과학의 발달을 기대하는 것 외에는 없다.

 

   죽음의 단계를 몇 가지로 나누어 놓았다. 간단히 생각하면 정신적 기능이 상실된 상태, 인간다운 삶에 필요한 육체적 기능도 상실된 상태, 단순한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생리적 기능만 남은 상태, 모든 기능이 상실된 상태처럼 나눌 수 있다. 또한 유의미한 활동을 할 수 있는가, 혹은 자신에게 미치는 삶의 득실관계를 따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단계를 계측하여 언제 삶을 중단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가. 자살을 일방적으로 나쁘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논의를 펼친다. 논의는 할 수 있지만 너무 큰 파장을 줄 수 있는 준비되지 않은 일방적 장광설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영원한 삶은 형벌이 아닌가 하는 것도 논리적 유희를 넘는다고 할 수 있을까? 끝없이 계속되는 것이 무엇이 즐거운가, 그것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가. 결국 죽을 것을 무엇을 위해 계속 음식물을 먹고 학습을 하는가? 이 세상이 고해고 삶이 괴로움인 것을, 자녀를 낳아 기른들 무슨 낙이 있다고 출산을 축하하는가.

 

우리의 몸은 영원하지 않다. 언젠가 그 기능이 멈추게 구성되어져 있다. 그것도 백여 년 안팎의 기간에.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우리의 삶의 동력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피할 수 없이 다가오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에 죽음을 의식하고 살아있는 기간을 의미 있게 살아내야 한다. 나비의 일생처럼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 땅이 끝이 아닐 수 있다. 애벌레처럼 사는 생애가 모든 것일 듯 하고 움직임을 멈추고 고치 속에 들어간 것이 죽음이요 끝이라고 여겨도 나비로서의 또 다른 삶을 맞이하는 고치들도 있다. 인류의 먹거리가 되는 식물들이 그 나무나 풀에서 분리되는 순간 생애가 멈춰지고 끝나는 것 같지만 그 후로도 형태를 바꾸어 유통되어 때로는 그들이 서식지에서 살았던 기간보다 더 긴 세월을 존재하고 적당한 여건이 주어지면 또 다른 생명의 여정이 반복될 수 있다. 지적인 인간은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스스로의 한계를 지킬 줄 아는 겸손과 지혜가 필요하다.

 

   온갖 영역에 관한 수많은 지식들이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온다. 진위가 분명치 못한 지식과 잘못된 지식도 유통된다. 지식과 기술의 향상으로 비밀스런 영역과 성스러운 영역이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머지않아 모든 것을 예측하고 계량화할 수 있는 순간이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것을 어쩌면 알파고가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 대단한 기계는 계량화할 수 없었던 감의 세계를 파헤쳤다. 정확히 계산할 수 있는데 누가 감에 의지할 것인가.

   인간을 상대로 하는 의술은 가능성의 영역을 계산 가능한 부분으로 바꾸어 놓을지 모른다. 그때 부정적 결과를 알면 누가 의료적 노력을 쏟아 부을 것인가? 우리가 이룩하는 과학적 진보가 축복이 아닐 수도 있다. 병원에서 태아의 성별을 확인할 수 있어도 알려 주지 않는 것이 현명할 수 있듯이 기술의 진보를 이룰 수 있지만 시도하지 않고, 노력하면 사실을 규명할 수 있어도 그냥 두는 것이 더 나은 경우가 있지 않을까. 영혼과 죽음 이후의 세계, 죽음의 순간과 선택도 그러한 영역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죽음과 그 이후의 것을 명백히 안다는 것이 두려움과 공포일 수도 있다. 찾아내지 못하도록 감추어 놓은 것을 일부러 애써 찾는 어리석음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