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야기/야곱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드보라)

변두리1 2016. 3. 10. 17:44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드보라)

 

 

  내 삶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주인집 딸인 리브가의 유모로 살다 그 아이가 성장하여 결혼해 먼 곳으로 떠날 때 주인은 나를 딸려 보냈다. 이십 년이 지나 아들 쌍둥이를 낳고 그 중 하나가 다시 이곳으로 와 결혼하게 되자, 나는 신랑을 거들고 살림을 도와주라는 명을 받아서 다시 이곳으로 왔다. 물론 함께 나이가 들어가던 아씨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나를 배려했던 것임을 잊지 않고 있다.

 

  다시 이 땅에 돌아와 보니 한 세기가 훌쩍 지나 있었다. 그래도 익숙한 들판과 냇물, 귀에 익은 말들이 내 마음을 푸근하게 해 주었다. 올 때에는 짧은 기간 머물다 결혼식을 마치고 그들 부부와 함께 돌아가려 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십삼 년의 세월이 빠르게 지나갔다. 물론 그동안 내가 이곳에서 놀고만 지낸 것은 아니다. 양쪽의 신임을 모두 받고 있어 양가 사이에 문제가 불거지면 나를 내세워 해결하곤 했다. 주인집에서도 나이를 생각해서인지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노비들의 인정도 받아서 큰 어려움이 없었다. 아씨 아들의 고향으로 가는 일은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장기간 늦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서로의 인원과 재산이 늘어나 좁은 땅에 함께 살기가 불편해졌다. 종들 사이에 자주 다툼이 벌어지니 뭔가 해결책을 찾아야 하던 차에 작은 주인 야곱이 섬기는 하나님이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단다. 가나안의 주인집에서도 그러했지만 그들에게 그분의 지시는 곧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다. 더욱이 최근 이곳에서 그 하나님의 능력을 겪어본 터여서 돌아가는 일은 확고하게 정해진 일이 되었다.

 

  이 가문의 최종 결정권자인 야곱이 어제는 내게 상의할 일이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였다. 긴 세월 보아온 바로 믿고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이 땅을 떠날 결심을 털어놓았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자신들과 처지가 또 다를 것이니 이곳에 남든지 함께 떠나든지 선택을 하라고 했다. 지체 없이 함께 가겠다고 했다. 본가의 큰 주인들과 지낸 것보다 두 배도 넘는 세월을 지금의 주인 가족들과 함께 했다. 그분들이 나를 대해준 것을 생각하면 내 삶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야곱이 말한 대로라면 헤어지는 마무리가 깔끔해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 헤어지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수십 년 부모와 자식으로 살아온 이들이 작별의 정도 나누지 못하고 한 쪽은 도망치듯이, 다른 이들은 귀한 것을 빼앗기듯이 헤어지는 것은 평생의 한을 만드는 일이다. 한 동네에서 눈만 뜨면 마주 대하던 이들에게 한마디 인사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서로에게 예의가 아니다. 내가 양편을 모두 알아서 하는 말이지만 재산이 그토록 대단한가. 어느 순간 늘어날 수도 있고 한 순간 날아가 버릴 수 있는 것이 재산 아닌가. 서로 만나 서운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다 털어내면 얼마나 좋은가. 딸들이 더 갖거나 친정 사람들이 조금 더 차지한들 다 그게 그거지 문제가 될 것이 무언가.

  이번에 작은 주인과 함께 떠나면 살아생전 다시는 이곳 고향땅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 그래도 후회는 없다. 내가 받은 명령을 끝까지 성실히 이행하는 길은 작은 주인을 고향땅으로 안전하게 모셔가는 것이다. 작은 주인에게 마지막 일처리에 대해 조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말고 없을 것이다. 두 부인은 남편의 의견이 워낙 강경하니 한두 번 권하다가 듣지 않으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고, 자녀들은 의견을 내세우기에 너무 어리다. 그렇다고 종들이 나서서 권할 수도 없는 일이다. 더욱이 큰 주인댁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니 대응할 수가 없다. 섣불리 이 사실을 알린다면 문제가 심각해 질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작은 주인을 설득하는 것이다. 나부터도 이제 떠나면 살아서는 만나지 못할 그리운 이웃들과 다정한 말이라도 나누고 헤어져야 한다. 큰 주인내외와도 그 간의 정리를 생각하더라도 도망치듯 떠날 수는 없다. 야곱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이십 년 긴 세월을 얼굴 맞대고 살던 이들에게 작별의 인사도 없이 떠난다면 누가 그를 신뢰할 것인가.

 

  작은 주인 야곱은 예상외로 완고했다. 가능한 빠르게 떠날 준비를 해서 큰댁 주인들이 양털을 깎기 위해 이곳을 비운 하루 이틀 새에 출발을 하겠다고 했다. 알아들을 만큼 설명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버지 이삭과 완연히 다르다. 야곱은 원하지 않으면 이 땅에 남으라고 했다. 그들이 떠났다는 것을 소문만 내지 않으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도 했다. 남을 생각도 없거니와 내가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게다. 그 길을 다녀본 사람이 야곱외에는 나밖에 없다. 어려움을 만나면 벗어날 길을 찾는 데 내 삶의 많은 경험이 큰 도움이 되리라. 커다란 아쉬움이 남지만 알리지 않은 채로 도망치듯 이 땅을 떠날 수밖에 없다. 마음이 편치가 못하다. 아쉬움이 너무 크다. 이젠 고향에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