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함께

더글러스 케네디의 빅 픽처

변두리1 2014. 6. 25. 14:55

더글러스 케네디의 빅 픽처

 

 

  저자와 줄거리에 대해서는 겉표지 속면과 옮긴이의 말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무엇을 더하려 하면 사족이 될 듯하다.

 

  이 장편의 글을 읽고 나서 느끼는 것은 어느덧 우리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무자동화의 영향도 적지 않겠지만 본인이 직접 가지 않아도 전산망과 대리인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어쩌면 그러한 경로로 처리되지 않는 것들이 갈수록 적어지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 무인기(無人耭)가 날고 있고 운전자가 없는 차가 곧 상용화되리라.

  게리 서머스가 죽고 벤 브래드포드가 게리 서머스의 역할을 해도 세상은 하나도 어색하게 여기지 않는다. 루디 워렌이 죽고, 게리 서머스의 사망기사가 나가고 장례식이 치러져도 온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진실을 알려 하지도 않는다. 인간관계가 한없이 느슨해지고 이해관계로 얽혀간다는 증거가 아닐까. 게리 서머스의 삶을 살았던 주인공이 이제는 40 여 년 전(정확히는 37년 전. 빅 픽처가 1997년에 발표됨)에 사망한 앤드류 타벨의 삶을 살아간다. 누가 죽었고 누가 사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개인의 삶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능력과 사회적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 월스트리트의 로렌스카메론앤드토마스 법률회사에 다니던 신탁유산 파트의 벤 브래드포드가 게리 서머스로 신분이 바뀌니 삼십만 불이 넘던 연봉과 부수적 혜택들이 사라지고 법률지식은 살아가는데 오히려 불편하고 불안한 요소들로 탈바꿈한다.

  또한 게리 서머스의 역할이 끝나자 자신의 노력과 행운으로 확보한 명예와 경제적 부가 모두 사라진다. 그가 찍었던 사진에서 파생되는 모든 이익도 그와는 관계가 없어지고 법률적 계약에 따른 수혜자와 기관들의 몫이 된다. 사진을 찍는 그의 실력이 향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자신들과 함께 일하기를 원했던 이들이 그가 게리 서머스가 아니라는(실제는 유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오히려 그의 요청을 거절한다. 동양의 오래된 정적(靜的)인 사고체계(思考體系)가 흔들리는 것이다. 우리는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실력을 쌓으면 “송곳은 주머니 속에 있어도 뚫고 나오고(낭중지추׃ 囊中之錐〯〯〯〯〯〯〯〯〯〯〯 ), 학은 많은 닭 무리 가운데 있어도 저절로 드러난다(군계일학 ׃ 群鷄一鶴)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직위가 중요하고 사회적 인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가정이 운명공동체(運命共同體)라는 개념이 점차 약해져가고 결혼의 절대성이 무너져가는 현실을 보여준다. 벤 브래드포드는 대학시절 케이트와 동거를 하다가 쿨(cool)하게 헤어지고 조시와 애덤을 낳은 베스 슈니츨러와도 그냥 편하게 살다가 결혼을 한다. 그 결혼도 아내의 불륜(不倫)과 주인공의 범죄로 위태위태하다가 그의 법적인 사망으로 파산을 맞는다. 몬태나에서 ⟨몬태난⟩지의 사진부장 앤 에임스와도 별다른 고민 없이 동거에 들어간다. 이러한 문화가 이미 우리에게도 익숙해져 있고 묵인과정을 거쳐 정당화 내지는 미화의 단계에 이른 듯하다. 밀려 온 현실의 물결에 그냥 파묻힐 것이 아니라 냉철한 자기정리와 우리사회의 가치관정립이 필요하다. 가정의 견고함과 인간적 가치가 너무도 쉽고 무력하게 무너지고 있다.

 

  어쩌면 『빅 픽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거운 주제를 던져주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냥 지나치기에는 석연치도 않고 편하지도 않은 나뭇결을 거슬러 문지르는 듯한 껄끄러움이 있다. 쉬지 않고 더 좋은 미래가 있다고 믿고 전속력으로 달려와 마주한 현대가 우리가 막연히 그려오던 유토피아(Utopia)가 아니라 편리함과 빠름 속에 훨씬 더 많은 모순과 문제를 지닌, 풀어내야 할 과제들이 산적(山積)한 곳임을 확인하는 당황스러움이 있다. 유토피아의 어원적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아름다운 풍광과 이야기의 긴장감 속에 현대문명과 오늘의 문화가 드리우는 어두운 그림자들조차 거대한 사진(빅 픽처)으로 작가는 독자들 앞에 내 밀고 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풀밭도 가까이서 보면 벌레들과 자갈과 나무들로 복잡하듯이 언제나 활기찬 생명의 축제가 펼쳐지는 듯 보이는 21세기의 지구촌도 상처를 안고 몸살과 질병을 앓고 있다. 달리 보면 그러한 현상들은 살아있음의 증거이며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디딤돌일 수도 있다.

  완벽한 곳은 없다.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그림자로 따라가고 승리의 환호성이 있는 곳에는 패배를 아쉬워하는 탄식이 함께 있다. 우리 사는 초록별이 공 모양이어서 한 장의 사진으로는 모든 곳을 보여줄 수 없고 모두의 마음과 지혜를 모아야 완벽에 가까운 대단한 그림(빅 픽처)을 만들 수 있다.

 

  같은 시대에 같은 곳에서 아름다운 큰 그림을 함께 그려가는 큰 가족(빅 훼밀리)으로 진실(眞實)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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