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해요(라헬)
나는 행복해요(라헬)
부모님에 의한 언니와 그분의 결혼으로 마음이 많이 상해 있었다. 열흘가량 친척집에 가 있었는데 무척 마음이 괴로웠다. 부모님과 언니 그리고 그분까지 다 야속했다. 내가 어쩔 수 없었으니 그분도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하기는 그분은 끝까지 신부가 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을 당하니 쉽게 현실감각이 돌아오지 않았다.
동생이어서 어려서부터 언니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커왔다. 힘세고 잘하는 것 많고 착했던 언니, 그러다보니 언니의 반만이라도 하라는 이야기를 많이도 들었다. 나이 들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왔다. 언니보다 내가 더 예쁘다는 거다. 예뻐지려고 내가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그냥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다. 언니보다 나에게 시선이 집중된다는 것이 좋았다. 언니에게는 의젓하다 착하다 언니답다고 하고 내게는 예쁘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으레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린 시절의 열등감이 내게 승부욕을 자극했는지 모른다. 언니와는 무엇을 하든 양보하기 싫고 이기고 싶었다. 그 면에서 가장 큰 쾌감을 주었던 것이 그분이 언니가 아닌 나를 선택한 것이다. 그분이 내 사람이 될 것이고 나를 위해 긴 세월을 우리 집에서 일하고 서로 무언의 약속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지난 칠년 여를 살아온 것이 내게는 큰 행복이었다. 하지만 언니가 먼저 그분의 아내가 되면서 다시 고통스러워지고 패배의식이 살아났다. 언니와 그분이 다정하게 지내는 장면이 떠오르면 몹시 괴로웠다.
집은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그분과 그 밤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분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언니와는 어색하기만 하고 할 이야기도 같이 할 것도 없었다고 했다. 며칠이 몇 년 같았단다. 그 말이 사실일 것이다. 집에 돌아와 처음 느낀 분위기의 원인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분과 나는 그 휴가기간을 밤낮 붙어있었고 할 말과 함께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순간처럼 그 기간이 지나갔고 낮에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 고통이었다. 그분은 매일 내게로 왔고 언제나 밤은 짧고 행복했다. 그런 일이 일상이 되었을 때 나는 그분에게 언니에게도 가끔 가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 말에 진심이 담기지 않은 인사였을 뿐, 그분이 내게로 오는 것이 하루하루의 승리처럼 여겨졌었다.
집안 여기저기에서 언니와 마주칠 때에 나는 언제나 당당했고 언니는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가끔은 부모님도 하실 말씀이 있는 듯해도 내게 대놓고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아마 그때 그분들은 내게 ‘눈치껏 살아라, 그 사람에게 언니한테도 가끔은 들르라고 해라’그런 말씀을 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처음에는 마음에 없이 인사로 하던 말이 어느 순간부터 진심어린 걱정이 되었다. 언니로서는 슬프고 마음이 상할 것이다.
아주 가끔 동네에서 친구들을 만난다. 그들도 이리저리 들어서 우리들의 관계를 대충은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원체 민감한 일들이라 내놓고 이야기하지는 않더니 얼마 전에는 제일 친한 친구가 ‘그래도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걱정스레 한마디 했다. 내 기분이 전달되었으리라. 언니와의 경쟁에서 일방적으로 이기는 것을 즐기고 있는 듯한 쾌감을. 하지만 나는 언니에게 밀리기 싫고 지고 싶지 않다. 언니도 충분한 고통을 겪어볼 필요가 있다. 내가 겪었던 것들을 언니는 지금이라도 느껴보아야 한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친척집에서 내가 겪은 혼란과 좌절의 순간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한번은 그분에게 언니에게 가끔은 들르라고 진지하게 이야기해 보았다. 자신도 알고 있고 생각은 그렇게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단다. 오늘은 그리로 가자고 아침에 다짐하고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결심을 해도 막상 언니에게 가야, 할 일도 얘기도 없고 어색하고 지루하기만 할 것 같아서 걱정을 하다보면 몸은 어느새 이리로 와 있다고 했다. 이곳에 오면 편하고 아무 얘기나 해도 즐겁고 어색하지 않단다. 나는 그러는 그분이 믿음직하고 더없이 좋다.
언니가 내게 왔다. 힘이 없고 얼굴이 푸석해 보였다. 언니의 그런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런저런 의미 없는 이야기를 한동안 하더니 내게 그분을 가끔씩은 자기에게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요즘 들어 내가 늘 생각하고 그분에게 이야기하던 바였다. 그런데도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내가 듣기에도 놀라웠다. 그분이 물건이었다면 날마다 보냈을 텐데 자기 생각으로 결정해서 스스로 찾아오는 걸 어떻게 막느냐는 것이었다. 게다가 언니에게 더 못할 말을 한 것은 그분이 언니에게는 그토록 가지 않고 내게만 날마다 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아니냐고 쏘아붙인 것이다. 언니는 ‘그래 알았다’며 먼 산을 보고 갔다. 나는 언니가 저러는 것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