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받은 내 사람(야곱)
공인받은 내 사람(야곱)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사랑하고 평생을 함께 하기로 정하는 것이 한 달이면 족한 것인가. 내 경우에는 한 달도 길다. 며칠로 족했다. 그저 그녀를 한번 본 것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첫눈에 온몸의 세포가 깨어났으며 그녀에게 강력하게 끌려갔고 전혀 벗어날 수 없었다. 내 생애 처음 있는 일로 그 후로 그녀는 내 마음에 항상 있었다. 어떤 이성과 논리로 설명할 수 없다. 그냥 그렇게 정해졌다. 남들이, 심지어 그녀 자신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 날 이후로 그녀는 내 사람이었다.
이곳에 온지 한 달여가 넘어가고 있다. 하루하루가 신난다. 이일저일 하며 지내고 있지만 일은 어떤 일이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녀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다면 불만이 없다. 내 사랑을 처음에는 몰랐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녀도 알게 되었고 싫어하는 기색이 아니다. 요즘에는 은근히 내가 주변에 있는지를 살피고 때로는 도움을 기대하는 듯도 하다.
오늘은 내 일생에 기념할만한 의미 있는 날이다. 저녁에 외삼촌이 나를 불러서 이 집에 온지도 벌써 한 달이 되어가고 언제 떠날지 모르니 하루하루를 그냥 일할 것이 아니라 품삯을 정하자고 했다. 내가 건강하고 남 못지 않은 힘으로 두세 사람 몫을 하니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곤란했던 모양이다. 그동안에 이 지역의 풍습에 대해 전해들은 바가 있으므로 외삼촌의 작은 딸을 위해 칠년을 일하겠다고 했다. 그는 긴장한 듯, 당황한 듯 한동안을 말없이 있더니 ‘남에게 주는 것보다야 낫겠지’하고는 그렇게 하자고 했다. 지나온 한 달이 무척이나 긴 듯도 하고 한 순간처럼 짧게도 여겨졌다. 드디어 그녀가 정식으로 내 사람이 되었다. 세월만 흐르면 내 아내가 된다. 꿈만 같은 일이다. 그녀 때문에 얼마나 즐거웠고 때로 애태웠으며 내 아버지의 하나님께 간구했던가. 나를 이 땅에 보낸 궁극적인 목적이 어머니도 그분도 그녀를 만나고 내 사람으로 삼게 하려는데 있었던 것 같다.
외삼촌과의 이야기는 곧 그녀에게 전해지고 빠르게 이 마을에 퍼져갈 것이다. 나와 그녀와의 관계도 공식화되고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수많은 이들도 한숨을 쉬며 포기할 수밖에 없으리라. 한동안 축하인사와 질투어린 눈총을 받아야 할 것이다. 내일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통 잠이 오지 않는다. 내일 하루는 육체적으로는 더없이 피곤하고 정신적으로는 새털같이 가볍게 날아갈 것 같은 하루가 될 것이다. 이럴 때면 어머니 생각이 간절하고 떠나온 고향집이 더없이 그리워진다. 모르긴 해도 어머니도 내 걱정에 쉽게 잠들진 못하실 게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설핏 잠이 들었다. 내 몸과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것이 그녀여서인지 꿈에서도 그녀를 본다. 둘이서 좁게 난 굴곡지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한 없이 걷다가 어느 순간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가 싶더니 사라졌다. 그녀를 찾느라 허둥대다 잠이 깼다. 뒤숭숭한 채로 무슨 꿈인가 생각하다 다시 잠이 들었다. 이번에는 내가 고향에 돌아가 있었다. 형과 화해가 되어 예전처럼 지내고 어머니도 여전하셨다. 그녀는 내 아내고 아이도 둘이 있었다. 풀밭에서 가족들과 함께 양들을 돌보며 편안한 한 때를 보내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어머니가 어딘가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이 모두 나서서 찾아보았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괜히 많은 일들이 걱정스럽다. 꿈속일망정 왜 자꾸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일까. 고향집 가족들은 모두 잘 있는지 궁금하다.
대충 세면을 마치고 일옷을 챙겨 입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오늘은 만만한 날이 아니리라. 어쩌면 토박이들이 그녀를 빼앗긴 분풀이로 나를 골탕 먹이려 할지도 모른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날이다. 그녀도 분명히 무슨 이야기인가를 내게 건네려 할 것이다. 그녀의 형제자매들도 암암리에 눈치만 채고 있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을 일종의 박탈감으로 느낄 수도 있다. 그녀를 향한 큰 기대가 나로 인해 무너졌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어제까지 그래도 남들 눈을 의식하며 그녀와 만나왔다면 이제는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다. 누구 앞에서라도 당당하고 떳떳하게 나서리라. 드러내놓고 그녀를 챙겨도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내 삶의 의미와 목표가 확실해진 것이다.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지켜야할 사람이 있고 항상 나를 바라보고 내게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이 집안일에도 더 이상 손님이 아니다. 사위로 당당히 참여할 권리가 있고 다른 종들과 일꾼들을 향해서도 감독할 권한이 생긴 것이다.
나도 그 이유를 분명히 모르지만 언제부턴가 내가 하는 일들이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잘 풀린다. 안될 듯싶었던 일들도 내가 맡아서 하면 신기하게도 잘 이루어진다. 나를 대하는 저들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느낀다. 아무도 나를 무시하지 않고 어딘가 모르게 어려워하는 것 같다. 벧엘에서 돌베개하고 자던 밤 내게 나타났던 그분이 언제나 내 가까이에서 나를 돕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녀를 내 사람으로 만들어 준 이도 그분일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