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밤 (꿈같은 하루 : 야곱)
잠 못 이루는 밤 (꿈같은 하루 : 야곱)
얼마만인가. 마음 편히 잠자리에 들어 본 것이. 집 떠난 후로 한 달이 넘도록 날마다 잠자리를 달리하며 지내 왔다. 아침이면 길 떠나며 잔 곳을 되돌아보고 그 날 잘 곳을 걱정하며 그동안 정처 없이 살아왔다. 하루의 삶에 지쳐 낯선 곳, 어설픈 자리에 누워도 그 순간 잠이 들곤 했는데 오늘은 내 목적지를 찾았고 염려도 없는데, 잠자리도 편하고 이부자리도 좋지만,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고 조금도 잠이 오지 않는다. 하루 동안의 일이 현실 같지 않다. 꿈을 꾼 것만 같다.
내 목적지를 정확히 알았던 것은 아니다. 하란에 있는 외가. 그곳에서 물어물어 찾아갈 수 있다고 믿고 떠난 길이다. 오늘 점심때 즈음, 도달한 곳이 하란 어디라고 생각했다. 샘과 푸른 풀밭이 있고 여럿이 걸터앉을 만한 바위가 몇 개 있었다. 몇몇이 그곳에 있다가 내가 나타나자 호기심어린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외할아버지 성함을 댔더니 안다고 하면서 금방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외가 마을에 드디어 도착한 것이었다. 안도감이 온몸을 휩쓸고 한순간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외가에 속한 이들이 모두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조금 있으면 양을 치는 딸이 올 것이라고 했다.
곧 양 울음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양과 한 아가씨가 샘가로 오고 있었다. 그들은 눈짓으로 그녀가 외가의 딸임을 알려 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몸의 모든 신경이 일어서고 감각들이 새 힘을 공급받아 깨어나고 있었다. 눈마저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가나안에서 숱한 여인들을 보았지만 이런 일은 없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깨끗한 살결, 전해지는 고귀한 품성은 나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녀에게 다가가 주절주절 내 소개를 하고 안부를 물었다. 큰 눈으로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무엇이라도 해보이고 싶었다. 장정들이 여럿 모여야 들어 옮길 수 있는 우물 덮개돌이 눈에 띄었다. 망설임 없이 다가가 그 돌을 들어올렸다.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놀라는 눈치였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모른다. 그냥 그 순간이 자랑스러웠다.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누가 소식을 전했는지 외가에서 사람들이 맞으러 나왔다. 함께 집으로 돌아와 서로의 안부를 전하며 한참을 붙안고 울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점심상 앞에 앉았다. 마음 놓고 밥상을 대하는 것이 얼마만인가. 식사를 하고도 한동안이 지나서야 지낼 방이 정해지고 피곤할 테니 쉬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낮에 본 그녀는 어머니의 오빠의 딸, 곧 내 외사촌동생이었다. 그 위로 언니가 하나 있는데 언니에게는 어떤 정이나 감정의 동요가 조금도 일지 않았다. 고향에서 보던 수많은 여인들 중의 하나와 같았다. 내 이야기가 어떻게 알려졌는지 계속해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때마다 외가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주로 어머니에 대한 안부와 살아가는 모습을 물었다. 이곳에서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전에야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내 방에서 누울 수 있게 되었다. 자리에 누어도 그녀의 모습이 떠나지 않는다.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녀가 이 울안에 있다는 것이 즐겁다. 어머니가 나를 보내며 이 땅, 외가에서 아내를 찾으라고 하더니 그녀가 아닌가 모르겠다. 내가 축복기도를 받고도 이곳으로 피하게 된 이유도 그녀를 만나게 하려는 그분의 뜻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순간에 사람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녀를 본 이후로 전혀 피곤하지 않다. 이전의 많은 일들과 고생들도 별것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전 같으면 피곤에 지쳐서 벌써 잠에 떨어졌을 텐데,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은 또렷해지고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앞에 나타난다. 내 마음이 왜 이런지 모르겠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고 이야기를 별로 나누지도 않았는데 그녀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데 내 마음은 벌써 다 그녀에게 가 있다. 하기는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것은 무언가. 집도 알고 배경도 알고 대충은 다 아는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내가 우물덮개돌을 들어 옮길 때 놀라는 표정을 지었을 뿐 별다른 감정의 동요가 없는 듯 했다.
이곳에서의 내 삶이 어떻게 전개 되려나 궁금하다. 몇 달이나 여기서 지내야 하는 것인가. 외가 사람들하고는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무슨 일을 하며 세월을 보내야 하는가. 그녀와는 앞으로 어찌될 것인가.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가 이곳을 떠났듯이 그녀도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나 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려나. 내일을 위해 몇 시간이라도 자두어야 하는데 걱정이다. 처음부터 건강하고 일 잘하는 모습으로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어야 앞으로 생활이 수월할 것인데 잠들기가 쉽지 않다. 집 떠난 한 달여의 세월이 머릿속을 순식간에 스쳐가고 다시 그녀가 자리 잡는다. 내일도 수많은 이들을 만나고 가나안 이야기와 어머니 안부를 들려주어야 할 텐데, 야속하다. 눈은 뻑뻑하고 머릿속은 몽롱한데 문밖은 훤히 밝아오고 닭울음소리와 부지런한 하인들이 여기저기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나도 일어나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