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활

영원을 꿈꾸다

변두리1 2015. 10. 13. 08:35

영원을 꿈꾸다

 

 

  시월이 왔는데 강아지풀 몇 포기가 푸른색을 버리고 밝은 미색으로 바뀐 채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학교 담벼락 앞에 굳건히 서있다. 어쩌자는 것인가. 잘 나가던 시절의 푸릇함 다 버리고 물기와 색깔 없이 버티고 있는 모습도 가련한데 비마저 맞고 있다. 나무도 아닌 풀이 그것도 우람하지도 않은 것이, 바람만 세게 불어도 부러지고 쓰러질 것 같은데 비에도 의젓함을 잃지 않고 견뎌내고 있다. 여름 한 철 무섭게 퍼부었을 장맛비도 저를 쓰러뜨리지 못했을 테니 이런 것은 시련이라 여기지도 않으리라.

 

  바랭이와 강아지풀이 그런 모습으로 자주 눈에 띈다. 그들을 보고 있자면 무슨 한()을 품은 듯하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는데 왜 자신의 때가 지나도 바닥에 깨끗하게 쓰러져 사라지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마치 초등학교 시절 방학숙제로 친구들이 제출했던 곤충채집의 표본이 된 잠자리처럼 혹은 책 중간에서 수분이 증발된 단풍잎처럼 스스로의 모습을 허물지 못하고 있을까. 인공적 처리라면 불쌍하긴 해도 이해는 되리라. 지난 삼월에는 더 기막힌 광경을 보았다. 풀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수분이 날아가고 색이 바래버린 풀들을 청주 근교 휴양림 길가에서 볼 수 있었다. 그 영하의 추위 속에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서도 끝내 허리를 꺾지 않은 힘이 어디에 있었는지 신기할 뿐이다. 이파리에 눈이 쌓이면 그 무게를 버티기 어려울 텐데 어떤 힘으로 견디는 걸까. 끝내 선채로 겨울을 난 기막힌 사정은 무얼까.

 

  창밖으로 보이는 지붕들이 본래의 색을 잃고 있다. 나무들도 청청함을 지나 조금씩 금빛으로 색을 바꾸고 있다. 변화와 소멸이 생명의 이치다. 생에 대한 애착으로 몸부림을 쳐도 자신의 시간이 지나면 다음의 존재에게 무대를 비워주어야 한다. 지나가는 바람에도 약해진 잎들은 치열했던 삶을 마감하고 조용히 땅으로 내려앉는다. 오뉴월에 정염을 불태웠던 장미, 그들을 지탱했던 잎사귀들 중에 아직도 줄기에 붙어있는 이들이 있다. 거무스레해서 비틀린 모습이 고집과 노욕인 듯 가련하다. 가라. 떨어져라. 미련을 버리라.

 

  마르고 닳도록 살아보려는 그들의 바람이 얼마나 부질없고 가여운가. 자신의 모습을 허물지 않고 한 철을 버티는 그들의 집념은 가상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잊히기 못내 아쉬워 동상을 만들고 비석을 세운들 대단한 것은 없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수백 년을 기린들 본인들에게 무슨 차이가 있는가. 세우고 기리는 필요와 욕망에 그들이 합치한다는 사실을 말해줄 뿐이다.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진 그분들과 함께 한 개인적인 경험이나 감정의 교류가 한 순간도 없다. 그분들로서는 더 말해 무엇 하랴.

 

  세계인들이 기리는 경이적인 건축물들이 정말 찬사를 받을만한 것인가. 그 건축물이 그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과 슬픔의 사연들이 만들어졌을까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몇 사람의 분에 넘치는 욕망 때문에 개인과 가정의 온갖 사정들이 무시된 채 긴 세월 노역에 시달린 이들은 그 건축물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고 할지 모른다. 경이로운 건축물일수록 고통과 수고가 컸을 것이다. 뒤집어보면 대단한 건축물 뒤에는 그에 비례하는 압제적 통치자가 있었다는 반증일 수 있다. 영원을 꿈꾸는 자체가 인간답지 못한 것이다. 인간이 이룩해 놓은 것들은 영원에 닿기 어렵다. 처음부터 그렇게 있던 것들이 영원까지 가는 것이다. 하늘과 땅. 산과 바다가 스스로 변화해가며 긴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

 

  인위적 노력으로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꺼져가는 생명을 생물학적으로 일정기간 늘일 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인간 구실을 못하는 호흡과 생명유지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호흡이 끊기면 인간의 육체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평생을 쉽게 하던 눈을 뜨는 것도 할 수 없고 재채기 한 번 못한다. 무능한 상태로 회귀하는 것이다. 허락된 기간 동안 열심히 살 일이다.

 

  집 주변에서 올 초에 겨울을 살아남은 대단한 풀을 눈여겨 본적이 있다. 아파트 담을 의지하고 모진 겨울을 이긴 그것은 의지의 표상처럼 당당하게 자리를 지키더니 어느 날 돌연 사라졌다. 나는 그 곁을 지날 때마다 눈길을 주고 한없이 그곳에 있어주기를 바랐건만 허무하게 종적을 감추었다. 의지가 약한 이들에게 자극을 줄 수 있을 것 같았고 주변에 보호망이라도 둘러주고 싶었던 그들은 주민센터에서 실시하는 공공근로에 의해 희생되었다. 잡초를 제거하고 쓰레기를 줍는 과정에서 어느 성실한 노인에 의해 간단히 제거된 듯하다. 영원을 욕심낼 것이 아니라 내 시간을 살고 깨끗이 떠날 일이다.

 

  학교 담벼락 앞 강아지풀이나 지날 때마다 잘 지켜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