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쓰는 유서
미리 쓰는 유서
먼저 놀라지 마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쉽게 죽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이 글을 쓰는 것은 최근에 읽은 책 때문이다. 갑자기 중한 병이 들면 환자의 생각을 몰라서 가족들이 많은 고생을 한단다. 환자 자신도 남기고 싶은 말을 못할 수 있으니 평소에 준비해 두는 것이 좋다는 데 따른 것이다. 내 부친도 예상치 못한 뇌졸중(腦卒中)으로 한마디도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장인어른도 쓰러지셔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가셨다.
결혼 전 가족들에게 먼저 고마움을 전합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부모님, 두 형님과 형수님 그리고 누이여 감사합니다. 저 막내도 언젠가 하늘로 돌아갈 것입니다. 어렵고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그 때를 늘 기억합니다.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는 가난과 어린 시절이 있는 가 봅니다. 한 가족으로 태어나 제가 가장 큰 혜택을 누렸지요.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신념대로 살려고 애를 썼지만 다른 이들에게나 저 자신에게 늘 부족했습니다. 저의 한계였음을 고백합니다.
현재의 가족들에게 씁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 말이 턱없이 부족함을 알지만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네요. 아내에게 감사합니다. 모순과 무능덩어리인 나와 긴 세월을 사느라 고생이 많았던 것을 잘 압니다. 힘든 일들을 다 감당하고 세 아이를 훌륭히 키운 것은 온전히 당신의 공로요. 단지 목회자라는 것 하나만을 믿고 지지해준 것이 고마울 뿐이요. 무엇 하나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젊음이 가고, 좁고 긴 어둡고 그늘진 길만을 걷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하오. 세 딸들아. 고맙다. 너네는 힘들었겠지만 아빠는 너네로 행복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 모두 잘 커 주었구나. 모두 자신의 몫을 넉넉히 감당하리라 믿는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잘 지켜주실 것이다.
지금은 내가 건강하다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위험에 처할 때 이렇게 해 달라는 부탁을 하련다. 내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의식을 잃거든 생존을 위한 의료행위는 하지 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 머물라 하시는 동안 사는 것이지 우리는 이 땅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늘나라를 바라고 산다. 부르시면 기다렸다는 듯이 기쁘게 가련다. 모두가 모일 곳이니 시차(時差)만 있을 뿐이다. 이 땅에서 잠시 볼 수 없는 것이 서운하지만 더 큰 희망이 있으니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내 몸은 화장은 끔찍하니 먼저 매장했다가 20여 년 지나 화장하도록 해라. 내 소유물은 보존할 만한 것이 없으니 적당히 처리해라. 책 중에 쓸 만한 것들은 주위 목회자들로 가지게 하라. 경제적으로 유산이 될 만한 것이 없으니 그 문제는 이야기할 필요조차 없구나. 교회건물은 함께 모여 상의해서 결정되는 대로 하면 좋을 것이다.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세상을 좇아 살지 말라는 것이다. 내 판단에는 작은 교회에 희망이 있다. 내가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만 작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여라. 큰 교회는 제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자본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성도 개개인을 귀하게 여기고 인간적 대우를 할 수 있는 곳이 작은 교회다. 목회자가족을 존경하고 도우며 살아라. 헌금생활을 철저히 해라. 특별히 감사예물을 많이 드리고 가능하면 범사에 감사하라. 돈을 좇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라. 내 경험으로는 믿음으로 사는 삶은 세상적인 것과 정확히 반대인 것 같다. 서로 배려해서 마음상하는 일이 없게 하라. 모순될지 모르지만 감정을 충실히 표현하되 오해나 상처가 없도록 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날마다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이다. 교회나 목회자가 내 신앙을 책임져 줄 수 없다. 자신의 신앙을 철저히 지키고 교회에서는 섬기는 삶을 살아라.
가족 중 누가 어려워지면 자신의 삶이 흔들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도우라. 도와준 것이 잘못되어도 서로 원망하지 않을 정도가 상한선이다. 혼자 남는 부모를 늘 기억하고 잘 모셔라. 모든 결정은 의견일치로 하고 안 되면 시기를 늦추든지 아예 하지 마라. 교회를 삶의 중심에 두고 한번 정한 교회는 결정적 문제가 있지 않는 한 옮기지 마라. 그러니 처음 정할 때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신중히 하라. 교회가 천 명 이상으로 커지면 옮겨라.
많은 것을 얘기했지만 성경이 언제나 우선이다. 밝히지 않은 것들은 성경을 따라 결정하고 행하라.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고 선을 베풀라. 하나님께서 항상 편들어 주실 것이다. 천국에서 만나자.
2015.7.7.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