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 김군에게
병산서원 김군에게
흐르는 강물 백사장 복례문 만대루 입교당 마루. 앉거나 누워있는 탐방객들. 오후의 따가운 햇살은 많은 이들을 지치게 하고 환상 속에 들려오는 글 외는 소리도 활기가 없기는 매 한가지였네. 마당가의 두 그루 배롱나무마저 더위를 힘겨워할 때, 서원 둘레를 돌다가 자네를 만났네. 멍한 얼굴에 피곤에 지치고 의욕을 잃은 듯한 자네가 너무도 인상적이었네. 더벅머리에 흰 바지저고리,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하는 것을 보면서 글공부가 수월치 않음을 눈치챘네. 잠깐 이야기를 하자는 내 말에도 자네는 바쁘다거나 싫다는 기색 없이 응해 주더군(왠지 나도 자네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어).
짧은 시간에 개인적인 깊은 이야기를 나눈 셈이지. 자네는 갈등을 겪고 있다고 했어. 글공부에 재능이나 흥미가 없는데 큰 기대를 걸고 계신 부모님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어. 정작 하고 싶은 것은 자기(瓷器)굽기와 그림과 장사라는 말에서도 고민의 흔적이 절절했지.
자네 이름을 학관(學官)으로 지으신 할아버지 심정도 이해가 되네. ‘배워서 관리가 되라’는 한(恨) 맺힌 절규시겠지. 몰락한 양반가문이 글공부 외에 무엇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겠나.
먹먹한 심정으로 자네가 털어놓은 이야기가 나를 놓아주지 않네. 먼 친척의 주선으로 병산서원 추천서를 얻고 더없이 환한 얼굴로 돌아오신 아버지. 자네에게 알리시며 벌써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든 듯 흡족해 하시던 일. 며칠을 고생해 마련한 돈으로 스승께 드릴 선물과 몇 말의 쌀을 가지고 타박타박 걸어오던 흙먼지 풀풀 날리던 멀고 먼 길. 후렴처럼 되풀이 하시던 “난 하나도 무겁지 않다, 넌 아무 걱정 말고 공부만 하라”는 말씀이 늘 귓전을 맴돈다고 했지. 그날 복례문 앞에서 옷차림을 가다듬고 자네 스승을 만나 문하생으로 허락을 받고는 감격에 겨워하시며 몇 번이나 고마움을 표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했네.
동네에서 소학(小學)을 겨우 마친 자네에게 이 곳의 글공부가 쉬울 리 없었겠지. 안 봐도 알아. 나이는 많고 실력은 달리고, 더하여 텃세까지 더해졌을 거야. 때로 자네가 하급생 숙사(塾舍)인 서재(西齋)에서 갈등하며 힘겨워 했을 것도 아네. 자주 두고 온 마을 뒷집 꽃분이 생각이 나고 제대로 말도 못하고 떠나 온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지. 왜 아니겠나. 헤어질 때 자네의 슬프고도 간절하던 눈빛이 잊혀 지지 않아 이렇게 편지를 쓰네.
돌아와 인터넷으로 자네 이름을 검색해 보았어. 17세기 인물은 없더라고. 그건 자네가 이렇다 할 벼슬도 못하고 어떤 분야에서도 역사에 남을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거야. 자네가 갑남을녀(甲男乙女)처럼 평범한 인생을 살다 간다는 거겠지. 내 생각에는 이제라도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것이 가장 좋을 거야. 처음에야 무척 서운해 하시겠지. 하지만 되지도 않을 일을 괴로워해 가면서 젊음의 세월을 허비한다는 것은 너무 슬프고 억울한 일이야.
알아들으실 만큼 말씀드리면 자네에 대한 기대를 접으실 거야. 주변의 시선보다는 재능 있고 즐거운 일을 하는 것이 맞아. 그래야 행복할 수 있지. 자네가 행복하게 살면 부모님도 만족해하실 거야. 깊이 마음에 있으면 뒷집 처자와도 혼인을 하고 그릇 가마 근처로 살림을 나서 그릇을 굽고 틈나는 대로 그림도 그리며 구운 그릇 중 잘된 것이 있으면 시장에 내다 팔아도 좋지 않겠나.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여러 가지 일을 해보면서 평생 할 일을 찾는 것이 바람직 할 걸세.
먼저 스승님께 상의를 드려도 좋겠네. 어쩌면 스승님도 자네가 학문으로는 대성(大成)하지 못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추천인과 관계도 있어서 먼저 말씀을 못하시는 지도 모르지. 그분은 많은 경험이 있으실 것이니 부모님 앞으로 설득편지를 써 주실 지도 모르지.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 얼마나 살겠나. 그러니 매 순간을 행복하게 살아야지. 무슨 일을 한들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나. 더구나 재능 있는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한다면야 잘 될 가능성이 훨씬 많겠지. 자신이 하는 일에 스스로 즐겁고 만족할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나. 남들이 인정해 주면 더욱 좋지만 인정을 못 받는다 한들 어떤가. 임진란을 겪으며 유학의 무력함과 선비들의 무능을 온 천하가 경험하지 않았나. 명석한 이들이 평생을 바쳐 글공부를 해서 그런 결과를 낸다면 자네 재능을 따라 편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모두를 위해 백 번 낫다는 생각이네.
잠깐 만나서 짧은 이야기를 나누고 내가 성급히 조언을 한다는 생각도 금할 수 없네. 자네 부친이나 스승께도 못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염려도 있네. 최종 결정은 모든 걸 깊이 생각해서 자네가 내릴 일이네. 다만 내 의견이 그렇다는 것이네. 이 편지를 자네가 읽을 수야 없겠지만 사람은 영(靈)적인 존재니 내 생각을 깊이하면 내 마음도 느낄 수 있을 거네. 서원 주변의 경치가 더없이 좋더군. 먼저 기분전환을 하게. 늘 건강하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