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활

감나무와 나의 추억

변두리1 2014. 6. 16. 21:28

감나무와 나의 추억

 

  내 어렸을 적 살았던 곳을 북리라고 불렀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외북동이 된다. 예닐곱 살 되었을 때 청주로 이사 왔으니 북리에 살던 기억은 가물가물한데 단편적인 기억 속의 뒤뜰에 감나무가 있었다. 잠자고 일어나 뒤뜰에 가면 하얀 감꽃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몇 개를 소중한 보물처럼 주워 가지고 놀던 흐릿한 기억이 그립고 달착지근하면서 산뜻한 그 향기가 어렴풋이 살아있다. 낮에는 햇살을 받아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감잎이 내 눈길을 붙잡고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익지 않은 떫은 감을 씹었을 때의 입안 가득한 텁텁함과 어쩔 줄 몰랐던 당황스러움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내 기억의 밑바닥에는 감나무가 있고 흰 분이 돋아난 쫄깃한 곶감이 있다.

 

  몇 해 전에 아는 분들과 우연한 기회에 감을 따러 간 적이 있다. 감 농사를 지으시는 분이 일손이 부족해 걱정이 많아 누구든지 아무 것도 몰라도 단순한 일만 해줘도 도움이 된다고 해서 어딘지도 모르고 갔다. 곶감을 만들 감을 따는데 연세가 많으신 분이 잘도 땄다. 그 날 감 따는 일을 도우면서 배운 것이 있다. 모든 과정을 잘 거쳐 왔어도 제대로 마무리를 못하면 이전의 모든 것이 헛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감 따는 한순간 잘못하면 땅에 세게 부딪혀 상품성은 그만두고 그 자리에서 먹을 수도 없었다.

 

  그곳에 그 후에 한 번 더 가게 되었는데 그날은 곶감을 만들기 위해서 껍질을 벗기고 또 그것을 몇 개씩 꿰어서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매다는 일을 했다. 감 껍질을 벗기는 일은 기계로 하는데 소심해서인지 겁이 났다. 잘못하면 기계를 고장 낼 것도 같고 내가 다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잘못될 가능성이 없는 껍질 벗긴 감을 매다는 일을 했는데 바람이 많이 불어서 정말 추웠다. 때때로 새참을 먹기도 했는데 집이 오래된 흙집이어서 여러 가지로 불편하다고 했다. 지대가 낮아서 비가 오면 물이 방으로 들어온단다. 마음이 아팠다. 육십이 넘은 내외분이 평생을 그렇게 사셨을 텐데…. 최소한의 품위는 유지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일에 집은 너무도 중요할 듯했다.

 

  세월이 흘러 소문을 들으니 뜻 맞고 감동된 이들이 건축을 하기로 한단다. 그들도 감 농사를 도와주러 왔다가 자신들이 해야 한다는 강한 감동을 받은 것 같다. 자신들의 삶도 만만치 않은 비슷하게 힘들고 어려운 이들이 온전히 자원봉사로 그것도 한겨울에 건축을 했다. 우리사회에 마음 따듯한 이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달여의 공사 끝에 집이 완성되었을 때 모두가 감격했다. 한겨울에 온 몸으로 무보수 자원 봉사한 이들은 자신들이 살 집을 지은 듯 기뻐하고 뿌듯해 했으며 참여한 모두가 감격했다.

 

  나는 그 과정을 보면서 실제적으로 그 집을 내가 소유하거나 사용하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집이 하나 생긴 느낌이었다. 내 마음속 집에는 감나무가 너 댓 그루 보기 좋게 자라고 계절에 관계없이 향기가 그윽하고 진한 감꽃이 피고 그 꽃들이 땅에 소복이 깔리기도 한다. 세 개의 방에는 항상 바구니 가득 감들이 담겨져 있다. 큰 방에는 홍시 작은 방에 곶감 손님방에 단감이 선명한 색깔과 그들만의 향기를 풍기고 있고 벽에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감나무들로 둘러싸인 마을 풍경이 그려져 있다.

  일 년에 한 번 쯤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는 현실속의 그 곳에 가서 그냥 주변을 둘러보고 오기도 하고,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날 때나 어디 가서 쉬고 싶을 때에는 내 마음속 감나무 집으로 간다. 내 마음속의 집은 나 혼자 있어도 허전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마음 맞는 이들을 불러들일 수도 있다. 그곳은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비좁지 않고 큰 소리로 떠들고 노래를 불러도 자유롭다. 그곳에는 평안과 위로와 따듯한 마음들이 있다.

 

  감꽃은 나의 희미한 유년의 향기를 떠올려주고 홍시를 보면 까치밥이 연상되며 곶감을 보면 새로 지은 그 집에 사는 분들을 생각하게 된다. 감나무는 내게는 사계절 즐거움을 주는 그리움의 나무요 추억나무인 셈이다. 감나무를 보고 있으면 또 어떤 사람들이 뜻밖의 계기로 마음 따듯한 일을 생각할 것 같은 기분 좋은 상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