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함께

태백산맥을 읽고 설움에 겨워

변두리1 2015. 1. 23. 13:09

 태백산맥을 읽고 설움에 겨워

-혼돈의 시대를 산 벌교의 민초들-

 

  긴 겨울 태백산맥을 읽고 있다. 오랫동안 밀린 숙제를 하듯이 마음으로 늘 벼르던 일을 하는 셈이다. 아직 전 과정을 독파하진 못했지만 7부 능선을 넘고 있는 중이다. 이야기가 무척 재미있어서 몰입되어 보고 싶지만 중간 중간 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 과업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 시절로 빠져들면서 서글프고 화가 치밀어 오른다. 어쩌면 그토록 철저하게 시달림을 받으며 질긴 목숨을 이어가야 하는가. 주어진 한 생애를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죽지 못하고 살아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기는 한 것인가. 그 꼴보기 싫은 인간들은 왜 죽지도 않고 여유를 부리고 살면서 징그러운 뱀들처럼 온몸을 조이며 민중들에게 모욕적인 고통을 지속적으로 주는가.

  태백산맥에서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여인이 외서댁이다. 강동식의 아내로 결혼하여 아이들만 남겨둔 채 남편은 공산당이 되어 떠나고 혼자서 힘겹게 아이들을 키우며 험한 세상을 살아간다. 민중들이 살아가기에 만만한 시절이 언제는 있었을까만 일정시대도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권력의 양지에 서는 이들, 재력으로 세상을 요리하는 이들, 완력(腕力)으로 주변을 평정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한결같이 존재한다. 너무나 불평등해 보이고 부조리한 현실에 끓는 피를 가진 이들이 공산당으로 빠지고, 산으로 들어가고 그들은 국가세력 더 정확하게는 부조리한 현실에, 공권력과 지주세력에 맞서게 된다.

  해방이 되어도 그들에게는 절망감만 더할 뿐이다. 친일반민족세력은 척결되지 않고 토지개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정 때에 득세했던 이들이 고스란히 미군정하에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자유선거를 치르고 대한민국이 되어도 여전하다. 오히려 서민들은 해방을 맞은 내 나라가 일정시대만 못하다고 느낀다. 그 시대적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몸과 마음의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외서댁으로 대변되는 하층민들이다. 아주 짧은 기간 동안 공산당은 벌교지역을 장악하고 그들은 증오와 질시의 대상이었던 경찰과 지주들을 처형한다. 그러나 그들이 쫓겨가고 공권력이 다시 자리잡자 공산당 가족들이 전 방위적으로 고초를 겪는다. 경찰과 군으로 상징되는 공권력에 의해서, 그들에게 협조하는 깡패조직에 가까운 청년단에게 그리고 피해자 자녀들로 이루어진 멸공단에 의해 몇 번이고 수모와 곤욕을 치룬다.

  외서댁은 뒤숭숭한 혼란 속에서 청년단장이라는 개망나니 염상구에게 성적 폭행을 당한다. 염상구는 죄의식도 없고 가리는 것도 없는 뻔뻔함으로 지속적으로 그녀를 찾아가고 외서댁은 남편에 대한 죄책감과 이웃들의 눈을 의식하며 괴로와한다. 지속적인 관계로 아이가 뱃속에 들어앉고 염상구는 청년단원들을 통해 그 사실을 퍼뜨린다. 외서댁은 수치심과 암담함에 저수지에 몸을 던지지만 건짐을 받아 죽지도 못한다. 아이를 떼려고 온갖 노력을 해 봐도 이루어지지 않아 몸은 불러오고 사람들을 꺼려 할 수 있는 일도 줄어든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시동생도 소작문제로 지주와 다투다가  폭발한 감정으로 지주를 살해하고 산으로 들어가 공산당에 합류한다. 외서댁에게 염씨 가문은 은원(恩怨)이 엉켜있다. 형 염상진은 남편과 함께 온갖 어려움을 겪는 동지요 동정과 지지를 함께 받는 사상적 지도자이고 그 동생은 외서댁을 성적으로 농락하고 괴롭혀 죽이고 싶은 대상이다. 지역민들은 폭력으로 자신들을 괴롭히는 그를 징그러워하고 두려워하면서 극도로 미워하고 싫어한다. 외서댁의 남편 강동식은 그 사실을 인지하고 마을로 침입해 염상구를 처치하려 하지만 상처만을 입히고 오히려 자신이 염상구의 총에 죽임을 당한다. 아마도 벌교사람 대다수가 염상구의 사망소식을 들으면 후련해 했을 텐데, 자애병원의 전 원장은 자신도 그놈에게 어려움을 겪었으면서도 정성을 다해 그 버러지를 살려 놓는다. 기한이 되어 외서댁은 웬수의 자식을 산고 끝에 낳고 친정어머니인 밤골댁은 핏덩이를 염상구의 에미인 호산댁에게 갖다 준다.

  개망나니 염상구도 뒈질 뻔하다가 살아 뉘우친 게 있던지, 지 처사(處事)로 강동식이 자기가 쏜 총에 죽은 것이 못내 걸렸는지 성치 못한 몸으로 퇴원하자 가장 먼저 외서댁을 찾아가고 쌀 열 가마를 준다. 그것을 받아야하는 그녀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6ㆍ25가 터지자 좌익에서 전향한 이들로 조직한 보도연맹원들을 소집대기 했다가 줄로 엮어 골짜기로 데려가 처형하고 집단으로 매장한다. 인민군에 의해 벌교가 점령되자 그때는 거꾸로 미처 숨지 못한 우익에 깊이 관여했거나, 악질지주나,소작인들에게 원성을 산 마름들이 보복처럼 생명을 잃는다.

  우리민족 역사상 최대의 혼란과 고통의 시기에 이 땅에서 밑바닥의 삶을 살았던 시대의 민초(民草)들, 그들이 이 민족을 이어오는 뿌리이며 토양이고 주류(主流)이다. 몹시도 힘들기만 한 그들의 한 평생,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거듭 묻게 한다. 큰 키에 넉넉한 덩치 그리고 순한 눈을 가졌음직한 외서댁, 염상진 하대치 김범우 안창민 손승호 서민영 강동식 강동기 심재모 소화(素花) 이지숙 들몰댁 죽산댁 밤골댁, 벌교와 율어마을, 스산한 시장통과 자주 마주치는 작은 키 벌어진 어깨에 찢어진 눈의 개망나니 염상구. 열심히 양심을 따라 살아도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몸과 마음이 고달팠던 시대. 그래도 힘들고 어려웠던 그들에게서 사람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