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움의 때
서러움의 때
눈발이 날린다. 창밖 나무의 모습이 싹틔우기 전 삼월의 모습과 같다. 그 때는 무슨 나무인가 궁금했었다. 이제 그 나무가 은행나무임을 안다. 마음이 가니 모르던 것을 알게 되고 보아도 모르던 것을 안보아도 안다. 하늘 향해 자라난 가지들 사이에 떨어진 나뭇잎 몇 개뿐, 모든 잎들이 열 달 가량 머물던 곳을 떠났다.
눈앞의 은행나무가 얼마나 살았는지 모른다. 보아온 한 해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을 뿐. 그 나무는 한 해를 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까이에서 보아온 내 짐작으로 나무는 한 해를 이렇게 보냈으리라.
긴 겨울이 가고 봄이 되었다. 주변의 나무들은 푸릇푸릇 새싹이 나고 생기가 도는데 내 몸에선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 겨우내 움츠렸던 이들이 기지개켜듯 푸른 싹이 돋는 나무들에 큰 관심을 보이며 내게는 눈도 한번 주지 않는다. 늙은 것일까, 이대로 죽으려나. 따듯함과 꽃샘추위를 반복하면서 세월이 흐르고 4월초가 되더니 여기저기 내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피가 돌고 막힌 곳이 뚫리더니 삐죽삐죽 푸른 잎이 솟아오른다. 내게도 새싹이 돋아나는 것이다. 자랑스러움에 주변을 힐끗거리니 다른 나무들은 푸른 잎들이 손바닥만하게 자라나 있다. 이제는 왜 다른 나무보다 늘 한걸음씩 늦는지 그것이 불만이다. 햇볕은 따스하고 온 몸은 나른해진다.
여름이 깊어간다. 새들도 나를 찾아오고 매미들도 날아와 종일 울다 간다. 더없이 행복한 나날들이다. 며칠 전 태풍과 장맛비가 온 나라를 휩쓸고 갔다. 남들은 근심ㆍ걱정이 가득해도 나는 염려 없다. 내가 뿌리내린 곳이 아파트 뜰인데다 좌우를 거대한 벽이 막아주고 있다. 내 주변의 친구들은 즐겁기만 하다. 내 가지와 잎들도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불어나고 있다. 어쩌다 푸른빛인 채로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잎들이 있지만 오히려 고맙다. 내리쬐는 햇살과 불어오는 바람들, 내게로 다가오는 온갖 새들이 사랑스럽다. 숱한 사람들이 들며 나며 장미를 위시한 예쁜 꽃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아무도 내게는 관심이 없다. 나도 내 꽃이 있는데 저들은 알지도 못하는 눈치다. 마음이 아리다. 왜 매번 나는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것인가.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들판도 누렇게 변해가고 내 잎들도 황금색으로 물들어 간다. 산에 들에 풀과 나무들은 그들의 열매를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다. 웬일일까. 내게는 전혀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 왜 내게만 유독 안 되는 일이 이렇게 많을까. 심지어는 벌레들도 내게는 쉽게 접근하지 않는다. 그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받아야한다는 것이 슬프다. 빛나는 황금색 부채들이 바람을 타고 내게로 온다. 나와 같은 족속 어쩌면 일가친척(一家親戚)일지도 모른다. 묻지도 않는 내게 그가 한 얘기는 나는 신랑이고 내 신부는 다른 곳에 있단다. 기가 막힌 것은 내 신부가 열매를 맺어도 사람들은 냄새가 좋지 않다고 싫어한다는 것이다.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철저하게 무시당해도 좋은 존재인가.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오른다. 화(火)때문인지 스치는 바람 탓인지 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아이들 몇이 소중히 주워들어 선물인양 가져간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무시하던 우리 열매들을 땅에 구르기 무섭게 주워가고 몇몇 사람들은 내 일가의 몸들을 들이치고 손들을 비틀어 꺾어 열매들을 털어간다고 한다. 그래도 우리에게 관심을 보여줌이 고맙다. 슬프고 서러운 것은 철저한 무관심이요 잊혀짐이다. 단색(單色)인 우리와는 다르게 나무들은 황홀한 색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 주말마다 사람들은 고속도로를 주차장으로 만들며 지리산, 내장산, 설악산으로 단풍놀이를 간다고 한다. 너무도 야속하다. 내게도 최소한의 관심을 보여주면 안 될 일이라도 있나.
힘이 빠진다. 잎들이 무겁게 느껴진다. 자고나면 내 잎들이 땅바닥에 수북이 쏟아져 있다. 바람도 통과하지 못 할 만큼 촘촘하던 가지와 잎들이 이제 새들이 지나가도 걸리지 않는다. 아무리 기를 쓰고 잎들을 잡으려 해도 약한 바람에도 투두둑 잎들이 빠져나간다. 내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하늘은 흐리고 바람은 차다. 한때는 애쓰지 않아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잎들이 번성하더니 이제는 노력해도 달아나는 잎들을 붙들 수 없다. 찬바람 속에 서럽다. 어느 때 한번 내 세상 이뤄보지 못하고 남들처럼 넘치는 사랑 누리지 못했다.
모진 바람과 날리는 눈발을 맨몸으로 받아내는 것이 서럽다. 지나간 여름이 그리워져도 돌아갈 수 없는 옛날일 뿐이다. 더욱 힘겨운 것은 밤이다.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고 대화할 상대도 없이 잠 못 이루고 추위에 떠는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모른다. 세상에 나밖에 없는 듯한 절대 고독과 소외를 누구에게 알아달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서럽고 힘든 시절이 언제쯤 끝날지 나는 모른다. 내 한 생애가 이렇게 마무리 될까 너무 두렵다. 밤마다 전신주 우는 소리와 추위에 건물들이 견디지 못해 지르는 비명, 간간히 들리는 수도계량기 터지는 소리들이 나를 더 두렵게 한다.
하늘에 은하수가 얼어붙고 북극성이 움직이지 못하는 이 추운 겨울도 몇 달 가지 않는다고 할머니가 혼잣말처럼 흘리고 간다. 그 말의 진위(眞僞)를 나는 모른다. 설마 할머니가 나를 속이기야 할까. 그냥 믿어보는 수밖에.
오늘도 내 앞에 보이는 은행나무는 매서운 추위에 덜덜 전신을 떨면서 이 겨울이 어서 가기를 바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