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 아브라함(이삭)
내 아버지 아브라함(이삭)
아버지는 백 살에 나를 낳으셨다. 어머니는 아흔이셨다. 젊으신 부모님의 모습은 당연히 내게 없다.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가끔 들었지만 실감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내가 알고 겪은 아버지를 추억(追憶)하고 싶다. 내게 아버지는 다중적인 이미지로 남는다. 나를 끔찍이 위하신 아버지, 나를 경계하신 아버지, 내게 한없이 미안해하신 아버지. 어쩌면 그것들을 다 모아서 하나로 만들어야 나를 향한 아버지의 참다운 모습이 나올 것 같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나를 받았다고 여러 번 얘기하셨다. 하란을 떠나서 이 땅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 아버지 일흔다섯에 반은 약속이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자녀가 태어나지 않아 걱정하던 중 여든다섯에 다시 한 번 약속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때에 믿음이 부족하고 생각을 잘못해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복 형 이스마엘을 얻었다. 그로부터도 긴 세월이 지나 아흔아홉에 다시 약속을 받고 백 살에 나를 낳으셨단다. 어머니는 나를 낳고 얼마나 기쁘던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후로는 나를 위해 사시는 것 같았다고 많은 이들은 얘기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남들은 몰랐지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셨다. 주변 사람들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꼼짝 못한다고 했지만 정작 중요한 일은 아버지 혼자 어머니와는 상의하지 않고 결정하셨다. 돌이켜보면 다른 이들 보기에는 어머니와 나를 중심으로 아버지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나 그리고 어머니 순서로 우선권이 정해져 있었다.
내가 돌쯤 되어서 잔치를 하는 날, 형 이스마엘이 나를 구박하는 것을 어머니가 보신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화를 내고 형과 그 모친을 쫓아내라고 해서 그들이 다음날 바로 내보내졌다고 많이들 알고 있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나를 위해서는 한 공간에서 같이 지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이 서서 취하신 행동이었다고 언젠가 내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와 어머니보다 하나님이 먼저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사건은 모리아의 번제였다. 아버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을 하나님께 받았으니 곧 나를 그분이 정하신 곳에서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해도 안 되고 이유도 몰랐지만 다음날 바로 어머니와 상의 없이 그분이 정하신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려 했다. 그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극적인 명령으로 희생물이 수풀에 걸린 숫양으로 대체되고 내가 살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게도 절박한 순간이었다. 그때는 위기라는 느낌보다는 편안하다는 것을 느꼈는데 지금도 그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 사건은 집으로 돌아온 후에 부주의한 하인들과 별 생각 없이 쏟아 놓은 내 말로 어머니는 크게 서운해 하시고 아버지는 한동안 그 일로 어머니에게 시달림을 당하셨다. 그 후로 아버지는 내게 무척 조심스러워 하셨다. 내 보기에는 그때에 아들보다 하나님이 우선이라는 것을 확실히, 생활의 산 체험으로 정립하신 듯하다. 그 일을 겪고 나서야 그 사건의 의미가 무엇이고 왜 필요했던가를 알았다고 지나가듯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내게도 큰 의미가 있었다. 아버지에게 내가 제 일의 관심사일 수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분명히 알게 된 계기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아버지는 내 결혼에 부쩍 신경을 쓰셨다. 어머니 살아 계실 때 며느리를 들이려고 애를 쓰셨지만 이루지 못 했다. 내 나이 사십에 그것도 아버지의 특별하신 의지와 노력으로 가나안이 아닌 나홀성의 친척 중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레베카를 아내로 맞았는데 어머니 사후(死後)에 가문의 큰 경사요 위로가 되었다. 아버지는 결혼 후에도 드러나지 않게 내게 마음을 쓰셨다. 우리에게 후손이 없는 것을 자신의 탓인 양 안타까워하시고 그것도 우리에게 짐이 될까 드러내지 못하시는 눈치셨다.
자신의 자녀들이 가나안의 성향이 강하고 성정이 거칠다고 판단하시고 나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시려 아버지 생전에 그들에게 재산의 일부를 떼어주셔서 멀리 동쪽으로 옮겨 살게 하셨다. 그것을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야 나이든 하인의 얘기를 통해서 들어 알았다.
아버지는 야곱과 에서가 태어났을 때 그렇게 기뻐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분명히 하나님께 감사하고는 어머니를 생각하셨으리라. 아버지의 두 손자 사랑은 유별나셨다. 그 아이들도 엄마 아빠보다 할아버지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열다섯 살 되던 해에 하나님 나라로 가셨다. 아버지의 영향력이 얼마나 거대했던지 장례기간 동안에는 동네의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원근각처(遠近各處)에서 조문객들이 밀려와 마을이 북적거렸고 마을이 생긴 이래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도 했다.
아버지께서 하시던 일들을 해보니 얼마나 일이 많고 마음 써야 하는 것들이 끝도 없는지를 알게 되었다. 온 힘을 기울여도 원했던 결과를 얻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아버지와 비교되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 분의 대단함을 새삼 느낀다. 아버지. 아버지는 참으로 하나님 안에서의 거인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