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야기/아브라함

내 주인의 마지막 모습(엘리에셀)

변두리1 2014. 12. 27. 20:01

내 주인의 마지막 모습(엘리에셀)

 

  주인어른은 137세에 부인을 여의었다. 그 후로 38년은 더 사시고 175세에 하나님께로 가셨다. 아내를 하늘로 보내고 한동안 힘들어 하시다가 나홀성의 친족 레베카를 며느리로 맞고 아들 이삭이 새 가정을 이루어 열심히 사는 것을 보시며 기력을 되찾으시는 것 같았다. 자신도 그두라라는 여인을 후처로 얻어 여섯 자녀를 두시며 삶의 석양을 사셨다. 그러니 주인어른은 평생에 이삭과 이스마엘까지 여덟 분의 혈육을 두신 셈이다.

 

  그분이 아들의 가정을 보면서 불안하고 안타까이 여기셨던 것은 자신의 지난날을 다시 보는 듯, 자녀를 두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어른은 가끔씩 한숨을 쉬시며 ‘무슨 가정의 내력이라고 이렇게 손(孫)이 귀한가’ 라는 한탄을 하셨다. 나이 많은 자신은 오히려 늘그막에 자식을 줄줄이 두는데 정작 아들 내외에게는 자녀가 없는 것을 늘 안쓰러워하셨다. 아들 내외는 결혼한 지 20년이 되어서야 아들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주인어른은 그 때 누구보다 기뻐하시며 이제 한시름 놓았다고 말씀하시며 아들 쌍둥이라 더 좋다고 하셨다. 그분은 그들이 열다섯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는데, 손자들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셨다. 자신의 자녀들과 손자들이 말다툼이라도 하면 상황설명이나 변명을 들을 여지도 없이 손자들을 두둔하시고 언제나 그들을 먼저 챙기셨다. 나와의 대화에서도 가끔 아이들에 대해 말씀하시면 손자들 이야기가 더 많았고 때로는 쌍둥이인 그들을 서로 비교하기도 하셨다. 늘 하시는 말씀은 비슷했다. 그들에게 큰 기대를 하면서도 불만스러워도 하셨다. 말년에는 큰 애는 사내답기는 한데 덜렁대고 진중한 면이 별로 없다 하시고, 작은 애는 계집애 같긴 하지만 꼼꼼하고 속이 깊다 하시면서 그 둘을 반반씩만 섞으면 참 좋은데…, 라며 아쉬워 하셨다. 또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작은 애는 아들과 며느리를 닮은 것 같은데 큰 애는 할머니 성격을 많이 물려받은 것 같다 하셨다.

  어쩌다 풍문에라도 이스마엘 이야기를 들으면 어린 나이에 집에서 떠나보낸 것을 마음 아파하시며 어디서든 잘살았으면 좋겠다 하시고 그 어머니 하갈의 근황을 궁금해 하곤 하셨다. 이스마엘에 대해서는 일부러 찾아가 만나지는 않지만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다더라는 정도의 이야기는 수시로 듣고 있었다. 그분은 이스마엘이 나름대로 잘 살고 있겠지만 자신이 죽기 전에 재산의 한 부분을 떼어주어 미안함도 덜고 아비로서의 최소한의 할일을 해서 이스마엘의 서운함이 풀리고 부자관계가 원만해 지기를 바랐다.

  주인어른은 한편으로 아들 이삭을 걱정스러워 하셨다. 한탄처럼 하신 말씀이 ‘대가 약하고 일을 밀어붙이지 못한다’ 는 것이었다. 가나안땅에서 살아가려면 담대함도 있고 거친 면도 필요한데 이삭은 용해 빠져서 어떻게 살아갈지 염려스럽다고 하셨다. 예전에 모리아산에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질 뻔했을 때에도 소리라도 한번 질렀으면 덜 미안했을 거라고 하셨다. 그래도 위안이 되기는 자신에게나 하나님께 한 번도 대들거나 불만스러워 하지 않고 순종해온 성품으로 하나님의 큰 사랑과 도움을 받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는 누누이 말씀해 오던 것을 행동으로 옮기셔서 이스마엘을 불러 부자간에 이야기를 나누고 서먹했던 감정을 푸셨다. 이스마엘이 사양했지만 굳이 재산의 일부를 떼어 주셨다. 그날 그들과 지척에 있었던 나는 7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그들의 흐느낌과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되지 않아 후처 그두라와 그의 자녀들을 모아놓고 재산의 일부를 나눠주고, 어머니를 잘 모실 것과 되도록이면 가나안으로부터 먼 동쪽으로 가서 살라고 하는 유언 같은 말씀을 하시고 곧바로 그들로 가나안을 떠나게 하셨다. 당시에는 주인어른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했는데 세월이 흐르고 보니 아들 이삭의 독립성을 확보해주고 가나안의 풍습에 이삭이 조금이라도 섞이기를 원하지 않는 마음을 모두에게 완곡하게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주인어른이 돌아가시자 가나안땅의 두 형제 이삭과 이스마엘이 중심이 되어 장례를 치렀다. 38년 전 안주인이 돌아가셨을 때보다 이웃들의 관심과 도움은 더 컸고 그동안 어르신의 영향력이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볼 수 있었다. 그 며칠은 온 동네가 어르신의 장례식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어른의 유해는 그분이 직접 히타이트족의 에브론에게서 사들인 헤브론의 막펠라굴에 부인 사라 곁에 모셔졌다.

  가나안땅에 하나님께서 주인이신 가문의 세대교체가 온전히 이루어졌다. 가나안 이주 1세대가 떠나고 2세대가 자리 잡고 있다. 많은 이들이 염려했지만 이삭은 자신의 방식대로 지도력을 확보하고 가문을 잘 이끌어 가고 있다. 이삭은 나를 인정해주고 예우는 하지만 대부분의 중요한 일들은 자신 연배의 하인들에게 맡기고 있다. 나도 몸으로 하는 일에는 힘이 부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 집의 하인들도 세대교체가 이루어졌고, 주인어른의 퇴장과 함께 내 시대도 가버리고 말았다. 주인어른의 마지막은 지혜로우셨다.